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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디그’- 발굴을 통한 교감과 공명, 영화로 복원된 이야기가 남긴 것[미디어비평] 톺아보기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 승인 2021.02.15 16:32

[미디어스=이정희] 에세이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을 쓴 시인 도널드 홀은 자신의 불멸성이 장례식이 끝나고 6분 후면 소멸될 것이라며 위트 넘치는 '예언'을 한다. 평생 죽음이 화두였다던 노시인은 여든이 넘도록 쓴 글을 통해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며 예언을 무산시켰다. 

인간은 유한의 숙명과 싸워왔다. 영겁의 삶을 기원하며 무덤을 장식했고, 종교를 통해 영적 존재와 소통을 기원했다. 영원을 소망할수록 눈앞에 다가서는 건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시한부의 삶이다. 그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에 대해 <더 디그>가 한 마디를 전한다. 

발굴을 통해 만나게 된 이디스와 바질 

영화 <더 디그> 스틸 이미지 (사진제공=넷플릭스)

2차 대전을 앞둔 1939년 영국의 서픽, 그곳에 이디스 프리티(캐리 멀리건 분)가 아들 로버트(아치 반스 분)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온 나라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이디스는 생뚱맞게도 자신의 사유지에 있는 둔덕을 '발굴'하기로 결심한다. 

그 둔덕은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이디스 부부가 사둔 땅이다. 하지만 그런 고고학적 관심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남편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치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이디스는 '발굴'을 서두르고 발굴을 위해 바질을 고용한다. 

바질은 전문적인 고고학자가 아니다. 농부 아버지를 따라 오랫동안 서픽에서 살아온 그는 서픽의 땅을 잘 안다. 그리고 경험에서 체득한 것을 다지기 위해 다방면의 지식을 홀로 연마해 온 사람이다. 이디스 부부가 사놓은 서픽의 둔덕을 발굴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사람, 눈 밝은 이디스는 그런 바질을 알아보고 기꺼이 고용한다. 

바질은 전쟁을 앞둔 시기에 발굴이라는 주변의 비아냥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디스 부인의 둔덕이 그간 영국의 고고학이 미처 알아내지 못한 앵글로 색슨의 기원을 밝혀줄 소중한 유산이라는 믿음을 피력한다. 그리고 그를 증명하기 위해 영국의 변덕스런 날씨에 맞서 발굴을 주도해 나간다. 

영화 <더 디그> 스틸 이미지 (사진제공=넷플릭스)

영화는 둔덕이 자리잡은 드넓은 영국의 서정적 풍광을 배경으로 이디스 부인의 마지막 소망과 그런 소망에 공명한 바질의 신념을 풀어낸다. 기약할 수 없는 ‘발굴’이라는 과제 앞에 두 사람은 맹목적으로 교감한다. 

이디스와 바질의 교감은 어쩌면 그들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를 '과제'에 대한 공명이다. 그 지역 의사는 ‘소화가 안 돼서’라고 하지만, 나날이 심해지는 가슴 통증은 결국 이디스에게 시한부 삶을 선고한다. 그리고 지역향토학자로서 누구보다 서픽의 땅에 대해 잘 알지만 지역박물관, 그리고 대영박물관의 전문가들에겐 무력하게 발굴 권한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바질에게 이디스 부인의 둔덕은 그가 추구해온 발굴의 ‘마지막’이 될지 모를 기회이다.

영화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이지스와 바질 두 사람이 발굴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통해 교감하고 공명해가는 과정을 구구절절한 설명 대신 랄프 파인즈의 폭넓은 연기와 캐리 멀리건의 깊이 있는 연기의 앙상블로 여운 있게 그려낸다. 

그런 두 사람을 잇는 건 그간 이디스 부인 말고는 정붙일 곳 없던, 사차원의 정신세계를 가진 이디스의 아들 로버트이다. 우주를 향한 부푼 꿈을 가진 로버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주는 유일한 사람이 바질이었기에 로버트는 그에게 마음을 열고, 이제 로버트를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할 처지의 이디스 부인은 그런 바질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전쟁 통에 쓸데없는 짓이라던 바질의 '발굴'은 대영박물관 교수진으로 하여금 발 벗고 뛰어오게 만드는 성과를 낸다. ​​​​​​​너른 풀밭 둔덕 속에 감춰져 있던 거대한 배의 유적은 그가 장담한 대로 ,영국인의 조상인 앵글로 색슨족의 유장품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바질의 주장이 사실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발굴에서 바질이 배제되는 결과를 낳는다. 일개 '발굴'자인 바질은 전문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그저 일꾼에 불과한 처지가 되어 버린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바질은 발굴지를 떠나버리려 하지만, 그의 아내와 로버트, 이디스 부인을 통해 명예 대신 자신이 진짜 원하던 목적을 위해 발굴 현장의 일꾼으로 남기로 결심한다. 

발굴의 참의미

영화 <더 디그> 스틸 이미지 (사진제공=넷플릭스)

바질의 주장처럼 앵글로 색슨의 활동 시기를 6세기까지 끌어올릴 유적은 배다. 아니 정확하게는 배의 흔적이 남은 흙의 자국이다. 나무로 만들어졌던 배, 바다에서 둔덕까지 끌어올려져 앵글로 색슨족의 무덤이 되었던 배는 이제 부장품만을 품은 채 흙에 그 흔적을 남겼다. 발굴을 통해 부장품은 수확되고 배는, 아니 배의 흔적은 다시 흙으로 덮여 둔덕으로 돌아간다. 

바질의 열정과 그 열정을 지지해준 이디스 부인의 신뢰, 그리고 유적을 둘러싼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가 엇물리던 한바탕의 이벤트는 결국 흙으로 덮여 사라진다. 영화의 초중반부 갈등의 초점이 되던 유적이 후반부 다시 흙으로 덮이는 과정은 ‘허무’하기까지 하다. 마치 유한의 삶을 극복하려 애써보지만,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 인간사처럼. 

그렇다면 인생무상이 결론일까? 박물관 관계자들이 돌아가고 다시 흙을 덮기 전, 바질은 로버트의 청에 따라 그곳에 이디스를 초청한다. 이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앵글로 색슨의 배는 그곳에 이디스 모자를 싣고 우주를 향한 로버트의 꿈을 담아 마지막 항해를 한다. 이제 로버트를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엄마 이디스의 안타까움에 로버트는 우주를 항해하는 배를 통해 영원한 교감으로 안심시킨다. 지금 엄마가 자신의 곁을 떠나도 그 엄마는 우주를 향한 꿈을 꾸는 자신과 영원히 함께할 것임을 약속한다. 

이디스의 청에 따라 발굴 현장에 남은 바질은 후에 부장품 전시에 이디스와 함께 이름을 남긴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인 것이다. 실화로서 <더 디그>의 보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영화 <더 디그> 스틸 이미지 (사진제공=넷플릭스)

영화로서 <더 디그>가 여운을 준 장면은 그 무엇은 흙으로 돌아가기 전 이디스와 로버트, 그리고 바질의 항해의 순간이다. 오랜 아버지 병구완에 남편의 청혼을 뒤늦게 받아들인 이디스는 결혼을 했지만 남편과 오래 함께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아직 어린 로버트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점이 더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저 철부진 줄만 알았던 로버트는 유적인 배의 마지막 항해를 통해 그런 이디스의 마음을 다독인다. 어쩌면 이디스가 집요하게 바질을 독려하며 발굴에 힘썼던 이유는 그 '마지막 항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디스와 바질이 결국 대영박물관에 이름을 남긴 건 다행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성취한 건 앵글로 색슨의 유적처럼 아들에게 영원한 빛으로 남겨질 엄마, 그리고 발굴자로서 끝내 신념을 실현해낸 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에서 도널드 홀은 자신이 죽은 후 가족친지들과 슬픔을 나눌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집에 남겨진, 자신이 사랑했던 이들의 어찌 보면 하잘 것 없는 물건들의 처지를 걱정한다. 유적은 결국 먼저 살고 간 이들이 남긴 '흔적'이다. 부장품으로 다시 돌아온 앵글로 색슨의 유적이 담겼던 언덕은 이제 오래도록 로버트에게는 엄마와 마지막 항해의, 바질에게는 평생소원이었던 발굴의 '유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기에 발굴 현장에서 피어난 페기와 로리의 로맨스 역시 영화의 양념이 아니라, 전쟁터에 나간 로리와의 또 하나의 '유산'으로 기억될 일이다. 실화는 그렇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관계와 사랑, 삶으로 복원된다.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5252-j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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