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연주 사장이 공영방송의 정체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봄철 프로그램 개편을 밀어붙였다. 일일 시트콤을 새로 만들고 대하 사극에 광고를 붙여 연말까지 688억을 더 벌겠다고 한다. 그 동안 공영방송의 격에 맞지 않는다며 자제해온 협찬 수입도 크게 늘려 잡았다. 이 여세를 몰아 올해 439억 원 적자로 편성된 예산을 64억 원 흑자로 돌리겠다고 한다. 이왕 시작한 바에야 비록 어설픈 계산일지라도 맞아 떨어지기를 기대해보지만 조합원 상당수는 정 사장의 셈법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정 사장은 노동조합이 무능 경영을 질책할 때마다 공영방송의 적자는 다른 시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대하사극 안 만들고 구조조정 실시하면 흑자는 일도 없다는 무책임한 발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정 사장은 이번 프로그램 개편으로 평소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첫 걸음을 뗐다. 그리고 이참에 아예 KBS 운영 기조를 확 뜯어고칠 기세다.

최근 정 사장은 예산 운용 기조를 긴축 일변도로 전환했다. 이유야 어찌됐건 회사 형편이 어려운 현실에서 예산 절감 노력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합리적으로 선택돼야 한다.

정 사장은 비용 절감을 위해 수신료 현실화와 연계된 비전사업을 크게 축소하면서 국민에게 약속했던 수신 환경 개선 사업까지 재조정하기로 했다. 지난 1년 동안 KBS 구성원들이 큰 희생을 치러가며 추진해온 수신료 인상 노력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수신료 인상이 물 건너갔다는 노동조합의 지적이 있을 때마다 오히려 노동조합을 비난했던 정 사장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사업 경비 3%, 섭외 경비 10% 일괄 감축 방안과 연구개발, 정보화 사업 축소도 정 사장의 무능한 경영 실력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낭비 요소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불필요한 예산은 과감하게 줄이고 꼭 필요한 예산은 오히려 늘려 프로그램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경영의 본령 아닌가. ‘무조건’, ‘일괄’ 경비 감축은 당장 KBS 프로그램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고 이는 또 다시 적자의 악순환을 심화시킬 것이다.

이른바 자본 예산을 줄이기 위해 디지털 전환 일정도 늦춘다고 한다. 당장 올해만 311억 원의 디지털 전환 예산을 감축하기로 했다. 부족한 예산 형편을 반영한 것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아날로그와 디지털 동시 방송 기간이 길어지면서 KBS에 이중의 경제 부담으로 돌아올 우려가 높은 근시안적인 결정이다. 수신료 인상 무산에 따른 대응책으로 비쳐질 경우에는 공영방송에 대한 신뢰가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도 있다.

정 사장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음 달 대규모 인사를 단행한다는 소문이 사내에 파다하다. 최근에는 공사의 경영 위기 타계 대책을 전사적으로 수집하라고 지시했다. 소속 본부뿐만 아니라 타 본부와 센터에 대해서까지 영역 제한 없이 아이디어를 내라고 했다. 인사건 위기 돌파 대책이건 그 의도가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지난 4년이 넘는 세월을 허송한 정 사장이 이 시기 왜 갑작스런 변신에 골몰하는지 KBS 구성원들은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정 사장은 수신료 인상 실패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해온 노동조합의 정당한 요구를 정도가 아닌 꼼수로 넘기려 하고 있다. 근시안적인 프로그램 편성 조정과 무원칙적인 예산 삭감을 통해 꼼수가 달성된다고 한들 근본적으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이미 정 사장이 KBS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83% 구성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 사장은 지난 1999년, 한겨레신문 지상에 는 칼럼을 쓴 바 있다. 정 사장은 정녕 부실한 경영 실력으로 KBS를 죽이려는 것인가. 현명한 사람은 들고 날 때를 분명히 안다고 한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명확하게 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끝)

2008.3.18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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