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장영] <내가 죽던 날>이란 제목만 보고는 이 영화가 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 감독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현수(김혜수)는 이혼 중이다. 변호사인 남편이 바람났고, 그 과정에서 잔인한 이혼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런 와중에 차 사고까지 났다. 이혼을 선언한 남편은 지저분한 전쟁을 시작했고, 현수는 후배와 바람이 났다는 황당한 모함까지 받으며 왕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교통사고 후유증까지 겹치며 쉬었던 현수는 복직 준비 과정에서 상사의 제안으로 사건 하나를 맡게 되었다. 섬에서 벌어진 극단적 선택 사건을 마무리하라는 지시였다. 형식적으로 처리하면 될 간단한 사건을 맡아 복귀하라는 상사의 배려처럼 보였다.

극단적 선택이 맞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단순한 사건이었다. 그렇게 현장으로 간 현수는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의 모호함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섬의 특수성은 외지인들에게는 낯설거나 기묘하게 다가올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이미지

뛰어난 형사였던 현수는 섬에 도착해 태풍이 오던 날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아이 세진(노정의)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벼랑 위에서 아이의 신발이 발견되었다. 거친 파도로 인해 그곳에서 뛰어내렸다는 아이의 흔적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섬에 사는 아이도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그곳에서 거주하게 된 세진이 왜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섬마을 아이도 아닌 그 아이는 왜 그곳에서 유서까지 작성하고 거대한 태풍이 오던 날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낯선 이에게 경계심을 갖던 섬사람들도 현수를 조금씩 받아들이며 사건에 보다 집중하게 되었다. 아이가 살던 집주인 순천댁(이정은)은 말을 하지 못한다. 과거에는 말을 잘했지만 가족사로 인해 극단적 시도를 하고 그렇게 말을 잃어버렸다.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병든 조카를 지극정성 보살피며 사는 순천댁은 세진과 그나마 접촉이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순천댁을 상대로 자세하게 정황을 묻고 캐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필담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한계로 다가오니 말이다.

사망한 아이 사건을 추적하다 보니 의외로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죽은 아이에게 가족은 존재하고, 그렇게 그가 살아왔던 흔적은 남기 마련이다. 세진이는 소위 말하는 서울 부잣집 아이였다. 평생 어려운 일 없이 부잣집 딸로 살아왔던 세진이의 삶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저 성공한 건실한 사업가인 줄 알았던 아버지는 밀수를 해왔다. 그 사실을 몰랐던 세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진이 섬으로 가게 된 이유는 경철이 사망한 그의 아버지가 숨긴 밀수품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이미지

경찰과 검찰이 결정해 아이를 섬에 가뒀다. 그 집에 CCTV를 달아 아이를 감시했다. 형사 둘이 주기적으로 섬에 들어가 회유하듯, 숨긴 밀수품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감옥은 아니지만 감옥이나 다름없는 섬 생활은 어린 세진에게 지옥과도 같았을 것이다.

마약 상습범인 오빠야 그렇다쳐도 믿었던 아버지가 사실은 밀수범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린 세진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여기에 가족을 잃은 상황에서 사법기관이 아이를 섬에 가두고 CCTV로 감시하는 상황이 과연 정상이었을까?

세진을 감시하고, 밀수품을 찾기 위해 파견되었던 형사 형준(이상엽)은 그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 사비까지 들여 세진을 위한 물건을 사다 주는 등 수사를 위함이라 보기에는 미심쩍은 행동도 많았다.

손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은 형준이 결혼을 하게 되면서였다. 그저 단순히 형사와 감시자의 관계가 아닌, 그 이상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의혹이 더욱 커지는 이 사건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조금씩 드러나는 진실들 속에 현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말을 잃어버린 순척댁은 과연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그는 왜 진실을 숨기려고 하는 것일까? 작은 흔적들은 그렇게 진실을 알려주려 노력하고 있다.

영화 <내가 죽던 날> 포스터

스릴러 형식의 형사물 <내가 죽던 날>은 매력적인 영화다. 단순해 보였던 이 영화는 현수가 섬으로 들어가는 순간 새로운 장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장르물의 형식을 취하며 관객을 이끄는 과정도 좋았지만, 시작부터 견지해왔던 주제의식을 흐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반갑게 다가왔다.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여성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낸 여성 이야기다. 남성중심의 사회적 문제, 굳이 여성은 피해자라는 인식을 부각하려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도 좋았다. 여성 중심의 서사가 자리 잡아가는 과정 중에 이 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반갑게 다가온다. 성별로 나눠 공격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성들이 중심적인 존재로서 가치를 부여하고 그렇게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할리우드 영화 제작 여건이 여전히 백인 위주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흑인 영화인들이 모여 흑인들만의 영화를 만들었다. 백인 중심주의에서 유색인종의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실패도 존재했지만, 이런 노력이 현재의 모습으로 변모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여성 영화인들이 여성 중심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반갑게 다가온다. 세상은 남과 여가 반반 살아가는데 왜 모든 중심에는 남자가 존재해야 하는가? 이제 그런 시각을 바꿔야 할 때다. 그런 점에서 <내가 죽던 날>은 이런 변화의 중심에 선 영화다.

남자로 주요 배역들을 치환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는 결국 현재 등장하는 대다수 영화들 속에서 남자 주인공들을 여성으로 치환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결국 남성중심 사회가 만든 편견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 말이다.

<내가 죽던 날>은 영화적 완성도만이 아니라 여성 영화로서의 가치도 잘 표현했다. 여전히 억압받는 여성의 삶을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게 담아내며 연대를 해가는 그 과정은 여성 감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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