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180석에 달하는 ‘범여권’의 힘은 과연 대단했다. 국회선진화법에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은 입법의 모든 과정을 완력으로 밀어 붙여 핵심 법안을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라는 국회 내에서의 마지막 수단을 동원했지만 공수처법 개정안 등의 일방처리를 막지 못했다. 반대 토론을 충분히 보장하겠다는 여당의 여유(?)에 58명의 초선 모두가 필리버스터에 나서겠다는 호기로 답했으나 이 역시 의석 수의 논리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제 보수세력은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둥의 슬로건을 내세워 여당의 일방 행보를 비난하며 지지층 결집을 모색할 것이다.

여당의 ‘완력’은 지난 총선에서 170석이 넘는 의석수를 확보하며 이미 현실이 됐다. 당시 여당은 국회선진화법 등에 의해 국회가 어떤 법도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을 돌파하라는 것으로 선거 결과를 해석했다. 따라서 여당 입장에선 “국회 의석을 몰아줬는데도 성과가 지지부진하다”는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연말 정국에서의 일방 처리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전체 의석 수의 ‘5분의 3’ 가까이를 확보했다고 해도 일방 처리는 역시 부담이다. 충돌이 정해진 결말이라 하더라도 ‘불가피한 것’이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당은 상황을 이렇게 포장하는 것조차 실패했다. 개혁의 성과보다는 오히려 무리수를 강행하는 오만함이라는 부담만 안게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리수’의 대표 사례는 공수처법 개정이다. 야당의 비토권을 삭제한 법안 개정 자체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국민의힘이 후보추천위원을 정하는 것부터 실제 후보 추천에 이르기까지 ‘시간끌기’로 일관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개정안에 따라 7명 중 5명 찬성 구조로 후보추천위를 운영한다 해도 여전히 ‘친문 공수처장’의 탄생은 어렵다. 또 여러 사건을 한꺼번에 처리하기 어려운 공수처의 특성상 검찰 수사처럼 시간을 질질 끌거나 봐주기 수사를 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공수처장 인선은 공수처 수사의 중립성을 보장하는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 야당의 비토권을 삭제한 것은 무리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외교통일위원장)이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 문제는 여기까지 이르는 정치적 과정이다. 국회의장의 중재로 여야 원내대표 간 협의가 이뤄지는 가운데 공수처법 개정안이 상임위 단계에서 처리 수순에 들어간 것은 논란이 되기에 충분하다. 더군다나 일이 이렇게 된 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청구가 명확한 근거가 없이 이뤄진 연쇄효과라는 해석이 불가피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사태의 수습을 위해 나서면서 공수처 연내 출범을 주문한 결과로 보이기 때문인데, 이건 큰 문제다.

이 정권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 논란부터 1년 넘게 검찰과 힘겨루기를 계속하며 국민의 정치적 피로도를 높여왔다.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검사징계위 개최로 이 소동은 이제 클라이막스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당이 등을 떠밀고 청와대가 모른 척 하는 가운데 추미애 장관이 주도한 일련의 과정은 상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에 검찰개혁을 요구하며 이 맥락에서 공수처 출범을 주장해 온 사람들까지 등을 돌리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공수처법 개정의 맥락은 이 지점에서 보수야당의 불성실보다는 여당의 계속되는 무리수로 규정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즉 공수처 출범의 당위가 퇴색된 것은 다수 의석으로 밀어 붙였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여당과 정권이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을 굳이 시작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오만함’은 이 과정에 대해 최소한의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가령 국회 정무위 안건조정위에 회부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공정거래위의 전속고발권 유지 입장에서 폐지로 후퇴해 정의당의 동의를 얻은 후 다시 유지로 돌아선 사례를 보자. 이런 ‘야바위’는 저잣거리의 불한당이나 생각할 법한 일이다. 책임있는 정치세력이 한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대통령의 공약인 전속고발권 폐지를 유지로 뒤집은 이유를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설명한 것은 무리수를 넘어 무성의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무리수와 오만함의 결과는 ‘개혁입법’으로 포장돼 이낙연 대표 체제의 성과로 평가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게 이낙연 대표의 대권가도에 도움이 될지는 두고 봐야할 문제다. 그렇잖아도 이낙연 대표는 지난 9월 월 2만원 통신비 일괄 지급 주장을 시작으로 윤석열 검찰총장 국정조사 주장과 최근 코로나19 신속진단키트 도입론에 이르기까지 헛발질을 계속하고 있다. 기대를 모았던 ‘이낙연 리더십’은 온데간데 없고 당의 부담을 키우는 역할만 하고 있는데, 한정된 기간 안에 핵심 지지층에 어필해야 하는 조급함이라는, 정치적 함정에 빠진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맥락에 갇혀버리면 이낙연 대망론은 바람 빠진 풍선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여당의 문제를 지적했지만, 그렇다고 이번 국면에서 보수야당이 대안적 성격을 보여줬다고 볼 수는 없다. 여당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고 필리버스터 종결 요구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보수야당이 자기들끼리는 통하는 논리만 반복하며 국민들의 마음에 가닿는 얘기를 꺼내지 못한 이유도 있다. 고려해야 할 여론의 부담이 덜했다는 거다. 신문과 방송 뉴스의 앞머리를 장식한 것은 ‘막말’이었는데도 자기들끼리는 윤희숙 의원의 12시간 47분 기록에 들떠 ‘철의 여인’이니 하고 있으니 누가 좋게 보겠는가.

이 와중에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폭정종식 민주쟁취 비상시국연대라는 단체의 공동대표로 추대됐다. 이 모임에는 이른바 ‘태극기 부대’로 불리는 극우인사를 비롯해 과거 정권에서 요직을 맡았던 이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 내부에서도 말이 많지만 주호영 원내대표는 뜻을 거둘 기세가 아니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사과는 15일 예정이지만 후퇴를 거듭해 의미가 많이 퇴색됐다. 유력 대권주자인 유승민 전 의원은 임대주택 거주민들에 대한 혐오를 키우는 언행을 거듭하고 있다. 국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양대세력이 욕을 더 먹기 위한 경쟁이라도 벌이는 듯 하다. 상대의 잘못을 자기 존재의 정당성으로 삼는 이런 정치는 유권자의 손으로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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