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트다운>을 보면서 '별주부전'이 떠올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의 중심에 간이 있거든요. 피도 눈물도 없는 채권 추심원인 '건호'는 갑자기 혼절하면서 자신이 간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식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어떻게 해서든 살려고 항상 그랬듯이 독한 마음을 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이식이라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가뜩이나 기증자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자신과 조직이 일치하는 부위를 이식받기란 제가 아이유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렵죠. 여기서부터 <카운트다운>은 영리한 설계 작업을 거친 영화임이 드러납니다.

건호에게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 어떤 연유로 뇌사에 빠지면서 각 신체기관을 기증했습니다. 그는 이걸 이용해서 수혜자를 찾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찾아가서 뭐 하려고 그러냐고요? 남은 거라곤 독기 밖에 없는 건호는 그들에게 가서 "내 아들이 기증해서 살아났으니 그 대가로 간을 내놓으시오"라고 할 작정입니다. 옛말에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한다고 했듯이 떳떳하게 말입니다. <카운트다운>에서는 한 사채업자가 건호에게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지고 그걸 갚으면서 사는 곳"이라는 의미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사죠.

채권 추심원이었던 덕에 관계자 한두 명을 구워삶아서 수혜자의 정보를 알아내는 건 우스웠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찾아다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다들 여의치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여자 한 명이 다행히 모든 면에서 그가 찾던 사람이었습니다. '차하연'이라는 이름의 그 여자는 일명 '미스 춘향 사건'을 저지른 화려한 사기범입니다. 마침 크게 한탕을 했다가 도리어 역으로 한탕을 당하면서 감옥에 갇힌 참이라 만나기도 쉬웠습니다. 우연치곤 좀 과하지만 출소도 며칠 앞으로 다가와서 돈을 주기로 하고 구두계약을 맺지만, 호락호락 간을 넘겨줄 차하연이 아니었습니다.

어떠세요? 간이 필요한 남자와 간을 준다고 했지만 맘을 바꾸고 골탕먹이는 여자가 보여주는 구도에서 '별주부전'이 언뜻 스쳐 지나가지 않나요? 실제로 <카운트다운>에서는 토끼와 거북이를 운운하는 대사도 나옵니다. 그런 걸 보면 이 영화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별주부전'을 염두에 두고 발전시킨 듯합니다. 이걸 재해석이라고 부르는 건 좀 맞지 않는 것 같고, 아무튼 전래동화를 바탕으로 새롭게 이야기를 각색했다는 점에서 <카운트다운>은 꽤 영리한 영화입니다. <블랙 스완>이나 <분홍신> 그리고 <장화, 홍련>도 엇비슷한 타입이라 아주 신선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시간의 모래에 파묻힌 이야기를 끄집어내서 꽃단장을 해주고 새 생명을 불어넣은 작업은 여전히 참신해 보입니다.

<카운트다운>은 이쯤에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변형을 가하고 있습니다. 건호와 하연의 관계도 흥미롭긴 하나 그 자체만으로는 현대적인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카운트다운>은 둘 사이에 몇몇 인물을 집어넣어 좀 더 복잡한 구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용하게 쓰인 것은 차하연의 정체입니다. 자그마치 170억을 30분 만에 땡기는 신의 사기술을 자랑했던 하연은, 간이 배 밖에 나온지라 감옥에 가기 전에 조선족 깡패인 '스와이'의 돈까지 꿀꺽 삼켰습니다. 그런 탓에 출소하는 순간부터 스와이에게 쫓기기 시작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했던가요? 하연은 감히 자신을 '수술'하고 감옥에까지 보낸 '조명석'이라는 남자를 찾아달라고 건호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가 부산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하연은 건호를 따돌리고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혀 조명석에게로 향합니다. 심기일전, 절치부심한 하연은 통쾌하게 복수하는 데 성공합니다. 성공을 하긴 하는데, 그게 발단이 되어서 스와이에 이어 조명석까지 혈안이 되어 하연을 쫓기 시작합니다. 이것 때문에 건호는 골치가 아픕니다. 자신이 살려면 하연이 이놈에게 잡혀도 구해야 하고 저놈에게 잡혀도 구해야 하니까요.

건호와 하연의 캐릭터가 '별주부전'에서 왔다면, 얽히고설킨 등장인물의 관계도는 흡사 가이 리치의 특기가 떠오르게 합니다. 후반부로 가면서 <카운트다운>은 가이 리치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려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심부의 바깥에서 서성이며 갈등을 조장하던 주변인물들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제 몫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만큼의 활력을 영화에 가미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최동훈 감독의 놀라운 장편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도 겹쳐지지만, 역시 빠르면서도 간결하고 게다가 리드미컬하기까지 했던 전개는 따라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카운트다운>은 결말부에 다다르기까지 준수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래시장의 골목을 휘저으면서 촬영한 자동차 추격전을 필두로 액션을 살리고, 건호와 하연을 비롯한 인물들을 한데 몰아넣어서 쫓고 쫓기게 만들어 몰입을 유도하며, 부수적으로 얹은 사기술과 배우들의 연기도 꽤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랬던 <카운트다운>을 좌초시킨 것은 흔히 우리나라의 코미디 영화가 자주 저지르는 드라마에 대한 욕심입니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본분에 충실했다면 좋았을 텐데, <카운트다운>은 결말부로 향하면서 안면을 바꾸고 드라마에 발을 담급니다.

그 드라마란 다름 아닌 각각 건호와 하연이 가진 부성애와 모성애입니다. 인간적인 면이라곤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지만 저들도 인간이라 우리가 보는 면이 다가 아니란 얘기죠.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고 하잖아요? 어쨌든 도입부부터 밑밥을 뿌린 덕분에 사실 전혀 뜻밖의 전환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드라마라는 카드를 꺼내기 전에 관객에게 보여줬던 패와 제대로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서히 극에 녹여내지 못한 <카운트다운>의 드라마는 마치 반전처럼 등장하면서 이질감을 갖게 할 뿐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각자의 색깔이 있던 두 캐릭터가 드라마에 발목을 잡히면서 위축됐고, 그 과정에서 각성제로 등장했던 장치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후자는 잘 나가던 <카운트다운>이 괜한 욕심에 사로잡혀 억지를 부리면서 신파를 만들었다는 데 확신마저 심어줬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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