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제가 악마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행위에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충실한 경우에 그렇습니다. 에디슨 전기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아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무시무시한 호기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하고 많은 영화 중에 굳이 <어브덕션>을 보기로 한 것도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 원인입니다. 미국 박스 오피스 소식에서 말씀드렸듯이, 테일러 로트너가 트와일라잇 시리즈 이후로 첫 주연을 맡은 <어브덕션>은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극악합니다. '로튼 토마토'에서 듣도 보도 못한 3%라는 수치를 기록하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봤다는 건 제가 일반적인 관람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도대체 얼마나 형편없는 걸까?"와 "좋아, 일단 보고 마음껏 까주겠어"라고 다짐했던 악마의 속삭임이 들리시겠죠?

누가 봐도 <어브덕션>에서 얼굴 마담의 역할을 하는 테일러 로트너는 조작된 삶을 살았던 10대 소년 '네이슨'을 연기합니다. 그는 부모인 줄 알고 지냈던 사람들과 알고 보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이 직후에 난데없이 들이닥친 남자들에 의해 두 사람이 사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네이슨은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여기에 CIA까지 얽힌 사건은 다름 아닌 그의 친부로 인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결국 네이슨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 때문에 두 조직으로부터 쫓기게 되고, 10대의 나이로 무려 국제적 범죄자와 CIA 요원을 상대로 추격전을 벌입니다.

테일러 로트너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이른바 '짐승남'으로 불리며 인기를 얻었습니다. 로버트 패틴슨이 속된 말로 기생오라비와 같았다면 테일러 로트너는 보다 남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죠. 두 사람이 이렇게 상반된 면을 가지고 있었기에 벨라가 10대 소녀들로부터 더욱 시샘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아무튼 트와일라잇 시리즈 이후로 첫 단독 주연을 맡은 <어브덕션>에서 테일러 로트너는 제이콥의 그림자 아래에 있습니다. 확고하게 이미지 변신을 하느냐, 아직 활용의 여지가 큰 전작의 캐릭터를 이어받느냐에서 후자를 택한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테일러 로트너의 캐릭터를 비롯하여 <어브덕션>은 여러모로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빚을 진 듯합니다.

우선 쉽게 흥분해 말이나 생각보다 몸이 앞서는 네이슨의 성향은 제이콥과 빼다 박았습니다. 당장 화면 속에 있는 네이슨의 옆에 벨라를 데려다 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한편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10대 소녀의 시점에서 진행하는 위험한 로맨스라면, <어브덕션>은 제이슨 본으로 변모한 10대 소년의 그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심지어 손발은 물론이고 온 몸의 주름이란 주름은 다 오그라들게 만드는 에피소드까지 똑같습니다. 다만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보며 감정이입을 했을 여자분들과 달리 전 도무지 공감이 안 되더군요. 그래도 뭐 이 정도는 다 이해합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이미 웬만큼 단련이 됐거든요. 사실 제가 10대를 지나온 지 꽤 됐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무슨 이유에서 <어브덕션>은 그토록 궁핍하기 짝이 없는 평점에 시달리는 걸까요? 유치하다 못해 전혀 부럽지도 않은 로맨스? 10대 소년을 졸지에 천하무적으로 만든 치기 어린 발상? 테일러 로트너의 부실하기 짝이 없는 연기? 솔직히 셋 다 <어브덕션>에 쏟아진 비난을 나눠 가져야 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단연 으뜸을 꼽으라면 역시 존 싱글톤의 연출입니다. 시나리오도 딱히 좋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존 싱글톤이 <어브덕션>에서 보여준 연출력에 비하면 수작입니다. 만약 MTV 시상식에 시나리오 부문을 신설한다면 적어도 후보에는 올릴 수준은 됩니다.

<샤프트, 분노의 질주 2, 포 브라더스>와 같은 남성적인 영화를 그럭저럭 잘 소화했던 존 싱글톤은, 이번에는 대상 연령이 낮아진 탓인지 비슷한 스타일의 <어브덕션>으로 아주 제대로 죽을 쑤더군요. 이건 뭐 보는 내내 스릴이라곤 느껴지질 않고, 그렇다고 화끈한 액션을 선보이는 것도 아니라 장점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갑자기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그리워졌었다고 하면 어떤 기분이었을지 십분 전달이 될까요? 연출에 있어서 기본적인 성의조차 보이질 않으니 흡사 존 싱글톤이 어거지로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것만 같았습니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에 "CIA 요원들이 악당의 아지트를 급습해 제압한다"라고 쓰여 있더라도, 감독이라면 이 과정을 관객에게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고 최선의 방법으로 연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브덕션>은 뭐가 그리 급한지 순식간에 들어가 경고도 없이 무작정 갈기면서 모조리 사살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관객들이 이걸 보면서 뭘 어떻게 느껴야 할까요? 네이슨을 보호하던 두 명이 친부모가 아니라는 게 뻔히 보였던 상황(?)조차도 무시하고 대충 수습할 때부터 미심쩍더라니... 존재감이 미미한 악역은 또 어떻고요. 그저 조연으로 출연한 시고니 위버, 알프레드 몰리나, 미카엘 뉘키비스트가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이들마저 없었다면 테일러 로트너는 생애 최악의 영화에서 홀로 발버둥쳐야 했을 겁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