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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처절한 실패의 다른 이름,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비상[미디어비평] 톺아보기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 승인 2020.11.28 19:50

[미디어스=이정희] 2000년에 제작된 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오래도록 회자된 명작이다. 영국 북부 탄광촌에 사는 소년 빌리는 복싱을 배우러 가던 도중 우연히 발레 수업을 보고 따라하다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광부인 아버지는 당연히 '남자답지' 못한 빌리의 선택에 반대한다. 하지만 빌리는 자신의 꿈을 접을 수 없었다. 

<빌리 엘리어트>의 대미는 탄광촌에서 꿈을 접을 뻔했던 빌리가 어엿한 무용수가 되어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장면이다. 토슈즈를 신은 여자아이들 뒤편에서 동작을 따라하던 꼬마가 우아한 백조가 되어 아버지와 형 앞에서 우아하면서도 절도 있는 몸짓으로 '백조의 탄생'을 알렸을 때, 관객들은 그들 자신이 아버지의 마음이 되어 함께 박수 치고 감동했다. 

여기 또 한 명의 청년이 백조가 된 빌리처럼 한껏 자신을 드러내는 우아한 몸짓을 내보이고 있다. 그런데 온몸이 땀에 젖도록, 다친 발을 감싼 붕대에서 피가 배어 나오도록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의 춤사위가 공연되는 건 관객을 마주한 무대가 아니다. 차이콥스키의 웅장한 음악도 없다. 그저 장단을 맞추는 건 소박한 북소리뿐이다. 당연히 관객도 없다. 혼신의 춤을 지켜보는 건 못마땅한 눈초리의 나이 지긋한 남자 둘뿐이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청년의 한 마리 나비처럼 나긋나긋한 몸짓에 어이없어하더니 자리를 떠버리고 만다. 하지만 청년은 춤을 멈추지 않는다.

영국의 노동계급 청년은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거듭났지만, 조지아의 청년은 자신이 원하는 춤을 추는 그 순간 그가 목표로 삼고 달려왔던 '미래' 자체가 함께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청년의 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웠다. 자유와 미래를 맞바꾼 춤, 무엇이 청년으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이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또 한 명의 미운 오리 새끼

영화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포스터

조지아의 청년 메라비(레반 겔바키아니 분)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형과 함께 조지아 국립 무용단 견습 무용단의 일원이다. 정식 무용단이 되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승승장구할 날을 꿈꾸며 밤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오늘도 열심히 온몸이 젖도록 춤을 춘다. 

하지만 강인하면서도 남성적인 몸짓을 지향하는 보수적인 무용단 전통에서 메라비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동작은 늘 지적의 대상이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한때 국립무용단원이었지만 이제는 시장판에서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더욱 절박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춤보다는 매일 사람들과 어울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노답'인 형, 거기에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어머니에 할머니, 돈이 없이 전기까지 수시로 나가는 메라비의 가정에서 돌파구는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밖에 없다고 메라비는 믿는다. 

정식 단원이라는 돌파구,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열망하는 조지아 국립 무용단 자체가 '미래'가 없다며 그를 설득한다. 아니 조지아 국립 무용단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루지야'라는 지역명이 더 익숙한, 세계에서 국호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1/3에 불과한 조지아. 나라 크기가 아니라 러시아와 터키 등 이웃 나라 틈바구니에서 국가의 존재가 불투명한 조지아에서 살아가는 젊은 청년 메라비의 '미래' 자체가 불투명함 그 자체다. 더구나 <빌리 엘리어트> 속 탄광촌 소년 빌리처럼, 춤에 전념할 수 없는 가난과 출신의 한계가 역시나 메라비의 발목을 잡는다.

영화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스틸 이미지

그럼에도 더욱 열심히, 자신에게 유일한 동아줄일 수도 있는 기회에 목을 매는 메라비. 그런 그의 앞에 이라클리(바치 발리시빌리 분)가 나타난다. 빠진 단원을 대신하여 등장한 이라클리는 절도 있고 완벽한 동작으로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시선을 사로잡고 메라비의 자리마저 빼앗아 버린다. 그런 이라클리에게 시기심을 느끼는 것도 잠시, 어쩐지 자꾸 메라비의 시선이 그를 향한다. 하지만 정식단원이었던 한 청년이 동성애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수도원에 유폐되는 처지가 되듯, 보수적인 조지아에서도 더욱 보수적인 국립 무용단에서 메라비가 느끼는 감정은 터부를 넘어 '매장'감이다. 

하지만 메라비는 이라클리를 향한 설렘을 숨길 수 없다. 그가 벗어놓은 티셔츠의 냄새로 그의 체취를 느끼듯 메라비의 마음은 자꾸만 이라클리를 향하고, 그런 메라비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이라클리 역시 호의를 넘어선 친근함을 표한다. 

<그리고 그들은 춤을 추었다>는 조지아 최초의 LGBTQ(성소수자) 영화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메라비와 이라클리의 사랑은 그저 성적인 지향만을 뜻하지 않는다. 조지아라는, 미래가 불투명한 사회에 속한 불안정한 젊음에 닥친 '성장통'을 상징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불투명한 젊음의 도화선이 된 사랑 

영화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포스터

주인공 메라비가 처한 상황은 그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그가 추고자 하는 전통춤의 미래도, 그가 되고 싶은 국립 무용단원도, 그의 가정도 그 무엇도 메라비에게는 녹록지 않다. 거기에 보수적인 조지아 사회와 더 보수적인 국립 무용단에서 '금기'시되는 이라클리의 사랑이 그의 불투명함을 가속화한다. 

메라비는 가정형편에서도, 그리고 국립 무용단이 지향하는 춤의 지향에서도 비껴가지만 어떻게든 자신이 성공이라고 목표한 그것에 자신을 꿰어맞추려고 한다. 선생님이 그의 섬세하고 우아한 춤사위를 지적할수록 그는 정식단원이 되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노력한다. 아버지가 가능성이 없다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그 불가능을 돌파해 보고자 한다. 전기조차 나간 형편에 형이 편법으로 전기를 끌어오지만 메라비는 그런 형이 못마땅하다. 대신 아르바이트에서 팁으로 받은 돈을 고스란히 가져다주고, 남은 음식 싸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성실하게 살아가려 한다. 

그렇게 현실에 저당 잡혔던 메라비에게 이라클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라클리를 향해 숨길 수 없는 마음은 결국 '금기'의 선을 넘게 만든다. 그리고 이라클리의 부재로 인한 방황이 동료의 눈에 띄게 되면서 그의 정체성이 무용단 내부에 소문이 되었다. 또한 그 부재는 메라비의 부상으로 이어져 그토록 집착했다시피 한 오디션의 기회마저 날려버릴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그가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얻고 싶었던 이라클리. 정작 그 이라클리는 메라비의 '순정'에 아랑곳없이 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메라비의 형이 그랬듯이, 이라클리 역시 돌아가실 어머니, 부양해야 할 어머니를 위해 고향 마을로 돌아가 약혼자와의 삶을 선택한다. 그렇게 메라비의 사랑도, 형도 자신에게 닥친 현실에 타협하는 선택을 하고 만다. 그들은 조지아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울타리에서 한 발짝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조지아의 백조 

영화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스틸 이미지

영화는 메라비의 사랑을 통해 조지아,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펼쳐진 두 개의 길,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자 한다. 형과 이라클리보다 어쩌면 더 철저하게 현실에 자신을 꿰어맞추려 노력하던 메라비는, 열정적인 순간을 뒤로 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해버린 이라클리의 결정 앞에서 좌절하고 반항한다. 그리고 그 반항은 그를 자유롭게 한다. 그가 지금껏 꿰어맞추려 했던 현실 앞에서 그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춤사위로 한껏 자신을 증명해낸다. 가장 부드럽고 섬세하고 섹시하기까지 한, 조지아의 전통적 춤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그런 몸짓으로, '그만하라'는 지시가 무색하게 자신이 추고 싶을 때까지 자신을 표현해낸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백조의 호수가 '승리'의 순간이었다면, <그리고 그들은 춤을 추었다> 속 메라비의 독무는 처절한 '실패'의 순간이다. 지금까지 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성공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순간이다. 그리고 터부시되어 온 자신의 정체성을 춤에 얹어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하다. 스스로 걷어찬 성공의 순간, 아니 성공이라고 스스로를 마취시켰던 마법에서 자신을 해방시킨 순간. 그래서 <그리고 그들은 춤을 추었다> 속 메라비의 독무가 <빌리 엘리어트> 속 백조가 된 빌리의 춤사위 못지않게 감동을 준다. 열광해주는 관객이 있든 없든, 그 춤사위들은 동일하게 자신을 극복해낸 '비상'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추고 싶었던 춤을 한껏 추고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간 메라비. 그는 이제 국립 무용단에도 조지아라는 사회에도, 그리고 그를 바닥으로 내리쳤던 사랑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청춘은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영화는 그걸 말해주고 있다.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5252-j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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