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와는 달리 <도가니>가 박스 오피스에서 높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벌써 100만이 넘는 관객이 <도가니>를 봤다고 하는군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실제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요구하는 등의 여론이 들끓고 있다니, 대한민국에도 최소한의 정의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다만 이것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군중심리나 일순간에 분노를 토해낼 대상이 필요해서 잠시 달아오른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인 어 베러 월드>는 분노와 복수가 아닌 용서와 화해를 호소했지만, 그 두 가지는 일말의 양심조차 없어 태연자약하게 행동하는 인간 이하의 대상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덕목이지요.

진정한 분노란 이럴 때 토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예인이 말실수 한 번 했다고 해서 갖은 언론이 재생산을 거듭해 온 국민으로부터의 돌팔매질을 부채질하고, 거기에 장단을 맞춰서 너도나도 흡사 배설욕에 시달렸다는 듯이 즉각적인 반응을 쏟아낼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암약하고 있는 부조리와 비리를 밝히고 뜯어고치는 데 매달려야 합니다.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는가?"라는 서태지의 노래처럼 말입니다. <도가니>의 실제 사건과 같은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일개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에 그리도 예민하게 반응합니까.

<도가니>를 보셨다면, 이럴 때 우리가 분연히 일어나 분노하고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물론 그 분노는 폭력적인 분노로 이어질 것이 아니라 부당한 현실을 개선하는 창구로 통해야 합니다. 참고 기사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가해자의 처벌만이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이 사건이 또 다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는 것을 허용한다면, 결국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이 승리한다는 건 동화책과 영화 따위에서나 볼 수 있는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화 <도가니>의 실제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하냐는 것은 크게 봤을 때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가 될 뿐입니다.

일전에 교통사고를 목격해서 당사자가 요구하지도 않았건만 먼저 가서 연락처를 건넸던 적이 있습니다. 목격한 그대로 증언할 테니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누군가가 제게 그러더군요. 오지랖이 넓은 거라고, 왜 남의 일에 나서냐고. 심지어 제 항변을 듣고는 '피터팬 신드롬'이냐는 말까지 했습니다. 피터팬 신드롬은 성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을 일컫는 용어인데, 그 성인 사회라는 것이 교과서에서 우리가 배웠던 바른 사회를 지향하지 않고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며 사는 곳이라면, 저는 기꺼이 피터팬 신드롬을 가진 놈이라고 자칭하면서 살겠습니다.

결코 대단하거나 거창한 일은 아니지만 제가 교통사고의 목격자가 되겠다고 선뜻 자청했던 건, 동일한 일이 나와 내 가족, 여자친구, 지인에게 발생했을 때 누군가가 저처럼 행동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도가니>의 실제 사건에 대해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 것도 당시와 동일한 사고관에 근거한 행동입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마음은 아프지만 그런 일에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고 지금 이런 일을 하나둘씩 외면하게 된다면, 만약에 그런 사건의 중심에 우리가 있으나 정의가 바로 서지 않고 진실이 왜곡될 때, 과연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수 있을까요?

<도가니>의 법정장면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분노하는 장면이 몇 번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그걸 보면서 상당수의 관객들이 웃더군요. 도대체 어떤 의식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그걸 보며 웃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분들도 영화가 끝났을 때는 저와 다를 바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아울러 100만 관객이 <도가니>를 봤지만 현재까지 서명운동에는 불과 25,000여 명이 참여했을 뿐입니다. 물론 서명운동을 한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가해자들이 응당한 법의 심판을 받거나 사회구조를 변화시킬 순 없지만, 우리가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현실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불의에 침묵하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쉽게 무릎 꿇는 미약한 잡초라고 봤다면 오산임을 항변하는 장입니다. 정의의 심판을 내릴 수 있게끔 촉구할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는 도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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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모 언론에서 지적했듯이 저도 <도가니>에서 끔찍한 장면을 촬영한 아이들의 사후 관리에 대한 부분에 유감이 있습니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할리우드에 비해 시스템이 빈약해 별도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제작사에서도 특별한 대처는 하지 않았다고 인정한 기사를 봤습니다. 대신 부모님이 항상 계셨고, 촬영장 분위기를 더 밝게 가져감과 함께 성인 연기자와 달리 구체적인 상황을 전달하지 않고 최소한의 것만 요구했다고 합니다.

완전한 설명도 없이 그만큼의 연기를 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게 됐습니다만, 설사 감췄다 하더라도 성폭력이 가해지는 장면임을 아역 배우들이 몰랐을 것으로 생각되진 않습니다. 비단 성폭력이라서가 아니라 그건 분명히 육체적, 정신적 폭력이 가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걸 감안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면, 그 역시 아이들에 대한 또 하나의 폭력이 어른들의 관점에서 버젓이 허용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도가니>에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장면을 삽입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였던 만큼 보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더군다나 <도가니>가 어떤 영화라는 것을 감안하면 제작진들의 이와 같은 처우에 굉장히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 참조

김용목,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 학교재단은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집중인터뷰] 영화 '도가니'의 모델이 된 광주 인화학교 성폭행 사건의 진실 - 인화학교성폭력 대책위 김용목 대표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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