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려졌다시피 <도가니>는 공지영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해당 소설은 놀랍고 끔찍해 믿을 수 없지만 엄연히 실재했던 일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청각 장애인을 가르치는 한 학교에서 교직원을 비롯해 심지어 교장까지 학생들을 수년 간 성폭행했던 사건이죠. 더 가관인 것은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른 작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제대로 된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사 몇 명을 제외하면 고작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것으로 재판이 마무리됐다는 것은, 이런 사건이 복지재단 산하의 학교에서 태연하게 자행됐다는 것만큼이나 믿고 싶지 않은 결말입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순전히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이었다면 차라리 지금 가진 박탈감이나 좌절감보단 덜한 기분일 겁니다. 무엇보다도 이건 공중파 방송에 의해 전 국민에게 전달이 된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리 한심한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역시 힘 있고 돈 있는 놈이 최고야"라는 말로 자조하고 넘어가기엔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걸 보면 정말 대한민국에서 정의는 다 썩어 문드러져서 바람 속의 먼지로 흩날려버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른 어떤 말로 저와 같은 기형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관객의 지워진 기억을 복원하고 있는 영화 <도가니>는 실제 사건과 배경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학교라는 것은 동일하지만 이름이 바뀌고 소재지를 광주가 아닌 무진으로 설정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충격적인 진실이 잘도 은폐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안개가 자욱한 무진을 택했을 것입니다. 이건 영화적 설정으로는 효과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영화에서 실화와 동일한 곳을 배경으로 삼았다면 명예훼손 등으로 인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성폭행한 인간들이니 그러고도 남을 만큼 뻔뻔하겠죠.

이 점을 제외하면 <도가니>는 비교적 사실의 재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친인척으로 구성된 학교의 내부 구조와 재판과정의 비루한 현실, 부모가 없거나 가정형편이 부실한 아이만 골라 성폭행한 것까지. 물론 영화다 보니 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도가니>는 특정 장르의 공식을 따르는 대신에 관객으로 하여금 끔찍한 진실을 목도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부 장면은 묘사가 적나라해서 보고 있기가 불편할 정도입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행여라도 관람을 꺼리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전 그래서 황동혁 감독의 연출을 높게 평하고 싶습니다.

사실 전 <도가니>가 썩 훌륭한 완성도를 가진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실화라는 것을 감안한 탓인지 전개가 지나치게 빠르거나 부실하고, 그 여파로 인해 종종 캐릭터의 심리와 행동은 개연성을 상실합니다. 특히 공유가 연기하고 극의 중심에 선 인호가 그러합니다. 이 인물만큼은 도입부에서 잘 다져놓은 설정에도 불구하고 차차 리얼리티가 퇴색하면서 흡사 천성이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영화를 보며 치를 떨 관객의 요구에 부합할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 그 원인이겠죠. 아울러 인호와 유진의 유대관계도 충실한 단계를 밟지 않고 금세 형성이 됩니다.

이 밖에도 냉정하게 바라보자면 단점은 더 있지만, 전 그리 이성적인 놈이 아닌 관계로 그것을 가지고 <도가니>를 평가절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아니, 추악한 현실을 드러냈다는 것에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럴 맘이 생기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더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똑똑히 보기를 바랍니다. 어제 <도가니>를 본 직후에는 영화가 예상했던 것보다 암울해 우려가 컸습니다. 굳이 공리주의를 주창했던 벤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고통을 외면하고 쾌락을 추구한다는 인간 본연의 습성을 실감할 수 있는 사례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만 하더라도 <도가니>의 관람은 선뜻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저로 하여금 극장으로 발길을 돌리게 한 것은 한 방송이었습니다. <도가니>의 개봉을 앞두고 현재 진행형인 실화를 보도하던데, 기가 막히게도 해당 학교에서 인면수심의 교사와 관계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여전히 근무하고 있다더군요. 더 울분을 토하면서 이 영화를 꼭 보고 싶도록 만든 건 학교 관계자의 말이었습니다. 6년 전에 일어난 일을 왜 책으로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영화까지 나와서 괴롭게 하느냐는 소리에 쌍욕이 튀어나오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겁니다.

그 덕분에 보게 된 <도가니>에 적어도 진정성이 있었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이 영화는 비록 미숙하고 서툴지만, 간혹 실화를 영화로 옮기면서 이슈로 삼는 것 외에는 고민과 책임감이 보이질 않던 영화들과는 분명 다릅니다. 실제의 사건을 보면 <도가니>는 스릴을 키우거나 법정에서의 치열한 공방을 세밀하게 다루면서 지금보다 더 오락적인 요소를 강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버리고 참혹한 현실의 묘사에 집중한 것은 감독의 연출의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칫 관객의 불편을 가중시킨다고 불평할 수도 있으나, 피해자인 아이들이 느꼈을 공포가 어떠했을지를 감안한다면 더 없이 효과적인 연출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가니>의 진정성이 바로 여기에 있기도 하고요.

한편으로는 <도가니>를 보면서 분노하는 것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들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장애아를 성폭행한 인면수심의 인간들과는 다릅니다만, <도가니>를 보면서 이른바 '냄비 근성'이라고 불리는 부정적인 성향으로부터 오는 죄의식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사건이 터졌을 때야 함께 분노했으나 어느새 잊었다는 것은, 우린 그저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뜻합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말하는 '그들'은 양심을 가진 교사들에 의해 실제 사건이 불거졌을 때, 진실을 외면하거나 무마하려고 했던 혹은 그것을 수용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도가니>를 보고 나서 전부터 읽고 싶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그 전에 먼저 마이클 샌델이 일찍이 비판했던 존 롤스의 '정의론'부터 읽는 것이 어떠냐는 지인의 조언이 있었습니다. 이 '정의론'의 서두에 있는 옮긴이의 글에서 아주 흥미로운 구절을 봤습니다. 자신이 '정의론'을 번역하고 있다고 하자 누군가가 "정의의 이론이 없어서 세상에 정의가 부재하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옮긴이는 이 발언에 대해 반론을 펼치긴 했지만, 저로서는 저 한 문장의 말이야 말로 <도가니>의,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태를 정확하게 꼬집었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잘못을 보고 비판하거나 분노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론' 따위를 읽지 않더라도 사회통념상 구분이 명확한 최소한의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는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가니>가 부수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그와 같은 사건이 생기면 누구나 앞장서서 악을 처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일이 현실에서 당연하지 않게 됐다는 것은 결국 어떤 이유로든 정의를 실천할 의지가 유약했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심각하게 자문해봐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만약 <도가니>를 보고 울분을 토한 우리 모두가 영화 속 , 정확히 말하면 현실의 사건 속 인물과 동일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고 가정한다면, 그렇게 욕하고 손가락질했던 것만큼이나 정의로운 행동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취할 수 있을까요? '정의란 무엇인가'가 국내 서점가로는 극히 드물게 100만 부를 돌파하면서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군림한 것에 비례하여 우리 사회에는 정의가 꼿꼿이 존립하고 있을까요? 하다못해 책을 읽었던 모든 사람들만이라도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제 답변은 부정적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부디 그러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인터넷에서 XX남 또는 XX녀라며 표적을 세우고 화살을 쏘기에 전념했던 모든 사람들이 도덕과 예의를 성실히 지키길 바라고, 연예인의 작은 치부마저 발가벗기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자신에게도 그러길 바라며, 여학우를 성적으로 유린하고도 뻔뻔하게 피해자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라도 가진 사람처럼 몰아가려는 의도의 설문지를 돌린 자와 그의 부모가 법적, 사회적으로 응징받기를 바라고, 그 설문지에 응한 자랑스러운 민족고대의 학생들에게도 상응하는 처벌이 뒤따르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실현되기 어렵다면, 적어도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정의만이라도 살아있는 사회이기를 바랍니다. 앞에서 언급한 방송에서 정의의 편에 서서 양심을 실천했던 교사분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이들에게 가해자들이 반드시 처벌을 받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이 지켜지지 않아서 안타깝다는... (영화에도 정확히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현실을 만든 자'라는 범주에서 과연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

덧 1) 데뷔 초창기에 공유 씨를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지인들한테는 간혹 말했지만 참 예의 바른 사람으로 기억하는데, <도가니>의 영화화를 처음에 기획한 사람이 다름 아닌 공유 씨란 말에 더 호감이 생겼습니다.

덧 2) 그와는 별개로 <도가니>에서의 연기가 참 괜찮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쉽사리 잊히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정유미 씨의 연기도 나쁘진 않지만 기존 작품들에서 보였던 이미지와 큰 차이가 없어 특별하게 와닿진 않네요.

덧 3) 진짜 연기력이 발군인 건 아역배우 세 명입니다. 영화로 직접 보시면 놀라지 않고는 못 배기실 겁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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