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세계육상선수권이 이달 초 성황리에 폐막했습니다. 대회 초반 미숙한 운영이 도마에 올랐지만 그래도 큰 사고 없이 잘 마무리돼 성공적인 대회로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경기장을 찾은 팬들의 수준 높은 응원, 열기, 그에 걸맞게 선수들 역시 날이 갈수록 수준 높은 경기력을 보여준 것은 흥미로웠습니다. 100m에서 충격의 실격을 당했던 우사인 볼트는 200m에서 2연패, 400m 계주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번개 세레머니'를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고, 요한 블레이크, 안나 치체로바 등 새로운 강자들이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대구 세계선수권을 마무리했습니다.

하지만 안방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에서 한국 육상은 웃지 못했습니다. 당초 '10-10' 프로젝트를 가동해 10개 종목에 걸쳐 톱10에 진입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지만 남자 경보 김현섭(20km, 6위), 박칠성(50km, 7위)이 '유이하게' 10위권에 입상한 것이 전부였을 뿐 나머지 선수들은 세계 벽을 넘지 못하며 고개를 떨궈야 했습니다. '한다. 된다. 됐다'라며 원대한 포부와 꿈을 안았던 한국 육상이 또다시 아픈 성적표, 현실만 받아들이며 허무하게 세계선수권을 마쳐야 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실망감도 적다고 한 사람도 있고, 홈에서 그래도 뭔가는 보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적인 시선도 많았습니다.

▲ 남자 단거리 간판 김국영. 400m 계주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100m에서는 실격을 당해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 연합뉴스
이번 대회에 출전한 한국 육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습니다. 마라톤을 제외하고 올림픽, 세계선수권에 나설 때마다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던 한국 육상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고 대회에 임했지만 역시나 현실의 벽을 실감하면서 대회를 마쳤습니다.

나름대로 홈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이었던 만큼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야심찬 목표를 세우며 준비를 해 왔습니다. 해외 전지훈련을 하기도 하고, 해외 유명 지도자를 영입해 선수들의 실력 향상에 힘을 쏟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남녀 멀리뛰기, 여자 허들 110m, 남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이 나와 모두 4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가능성을 보였습니다. 남자 100m 한국신기록도 나왔고, 몇몇 종목에서 가시적인 성과도 나와 어느 정도 기대감도 가져볼 만 했습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벽은 분명히 높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선수들은 홈에서 웃지도 못했습니다. 그나마 4개 한국신기록이 나왔고, 경보에서 두 선수가 체면치레를 해 이마저도 나오지 않았다면 한국 육상 사상 최악의 굴욕을 맛볼 뻔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단 한 선수도 메달권 뿐 아니라 5위 안에도 들지 못한 것은 경기장을 찾은 많은 팬들에게 실망감만 안겼습니다.

특히 기대했던 종목의 연이은 몰락은 안타까웠습니다. 한국 육상의 자존심과 같았던 마라톤에서는 20위권 선수조차 배출하지 못했을 정도로 부진했습니다. '간판' 지영준의 부상으로 구심점을 잃은 채 대회에 나섰다고 했지만 나름대로 신-구 조화를 이뤄 출전했던 만큼 단체전에서 내심 메달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력은 냉정했고, 홈그라운드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이외에도 남녀 도약 종목 간판 김덕현과 정순옥, 여자 장대 높이 뛰기 최윤희, 남자 허들 박태경 등이 기대를 모았지만 모두 부진한 성적을 냈고, 그나마 김덕현은 결선에 올랐지만 부상으로 뛰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경보를 제외하고는 트랙, 필드 모두 어느 것 하나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서 씁쓸하게 대회를 마친 꼴이 됐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분석, 평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막연한 목표와 크게 나아지지 않는 선수들의 동기 부여 의식, 일관성 없는 선수 관리와 유망주 발굴 부족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고쳐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 지는 잘 알면서 제대로 고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움직이기는 해도 내실을 기하지 않다보니 또다시 좌절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꼴이 된 한국 육상이지만 내년 런던올림픽에서도 이 같은 상황이 되풀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있습니다. 체계성, 의지, 국제적인 마인드, 장기적인 안목 없이는 어렵다는 것을 또다시 확인만 하고 넘어간다면 한국 육상의 발전은 또 정체할 수밖에 없습니다.

총체적인 문제를 겪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보는 남자 20km, 50km 모두 10위권에 진입해 새로운 가능성을 남기고 희망을 밝혔습니다. 남자 400m, 1600m 릴레이 역시 잇단 한국 신기록으로, 장기적인 육성과 훈련이 뒷받침되면 충분히 8위 내 진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준비만 잘 한다면 세계 수준의 도약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몇몇 종목에서 보여준 것은 그나마 큰 수확이었습니다. 또한 안방에서 세계적인 무대를 경험해보면서 보는 안목을 넓히고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은 분명히 선수들에게 좋은 약이 됐습니다. 매일 밤 결선이 열릴 때마다 많은 관중이 들어차 높은 열기의 응원이 펼쳐지며 육상도 충분히 인기 종목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긴 것은 우리 선수들에게도 좋은 자극제가 됐을 것입니다. 이제는 이 같은 교훈을 잘 엮어서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회는 끝났고, 안타까운 현실은 또 한 번 확인했습니다. 그래도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는 "자신감을 찾았다"면서 희망을 밝혔습니다. 그 자신감을 이제는 눈에 띄는 성적, 내실 있는 발전으로 서서히 만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이를 만들어나가지 못하면 한국 육상은 언제나 패배의식에 젖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육상계의 진정한 의지, 노력이 '진정한 꿈'을 이루는 계기로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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