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이 벙벙한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정부와 한전은 "늦더위로 인한 초과 전력 수요를 예측하지 못해 발생한 사고"라고 하지만 대통령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일류국가'를 강조하는 마당에 국가 운영 체계가 이 정도 수준 밖에 안 되는지 그저 기가 찰뿐이다.

비록, '인재'라는 점을 인정하며 '사과'하긴 했지만, 정전사태에 대한 정부의 해명 역시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높다. 전력거래소 통계 자료에 따르면, 15일에만 갑자기 전력수급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지난 1일 이후 실제 전력 사용량은 계속 예측치를 웃돌았다. 지식경제부는 동계 사용을 대비해 발전소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전력 공급이 원할치 않았다고 밝혔는데, 10여 일이 넘도록 전력 사용량이 예측치를 웃돌았다면 미리 조치를 취했어야 했단 지적이다.

예고 없이 순환 정전에 돌입한 상황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후진적 행태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일방적이고 게릴라식 정전으로 인해 시민들이 겪은 혼란과 불안은 이루 말할 수 없던 수준이었다. 이에 대해 지식경제부는 갑자기 전력 사용량이 치솟아 정전을 알릴 여유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최악의 상황으로 몰렸던 일본의 경우에도 사전에 정전을 예고했고, 지금처럼 매체가 발달해 있는 상황에서 알릴 여유가 없었단 발상 자체가 후진적이란 비판이 높다.

어찌되었건, 대규모 정전이라는 상식 밖의 사고로 인해 어제 하루 한국 사회가 겪었던 불편과 불안은 계측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이와 관련해 총체적 국가 운영의 실패라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시사평론가 진중권 씨는 개인 트위터에 이번 정전 사고에 대한 자가 정치성향테스트를 올려 폭발적인 RT를 받았다. 진 씨는 "이번 정전이 북한의 소행으로 느껴지면 우익, 각하의 꼼수라 느껴지면 좌익, 한전의 닭짓이라 느끼시는 분은 중도좌파, 천재지변이라 느끼시는 분은 중도우파"로 구별된다고 설명했다. 진 씨의 구분법에 따라 이번 정전 사고 과정에서 일어난 댜양한 난맥상을 정리해봤다.

우익의 실패, '북한 소행 가능성 99.9%'라던 송영선 의원

▲ 정전 사태 직후 송영선 의원은 '북한 테러설'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 네티즌은 "우익도 국회에 가는 건 좋은데, 그래도 정신줄은 있는 사람을 뽑자"는 반응을 보였다. 송영선 의원의 트위터 캡쳐
대규모 정전이 발생한 이후 오래도록 구체적인 정전의 원인이 알려지지 않으면서 온갖 억측과 논란이 분분했다. 이때, 국회 국방위 소속인 미래희망연대 송영선 의원이 개인 트위터를 통해(@sys741)를 통해 "어제 인천공항 관제체제 혼란, 오늘 전국 도처에서 30분 마다 순환정전, 250개 신호등 체제 교란, 지역마다 휴대폰 장애, 모두가 별개의 사고가 아니다"라며 "북한의 사이버테러에 의한 혼란 가능성이 거의 99.9%다. 농협전산망교란, 2009.7월 Ddos교란과도 같은 성격"이란 글을 올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17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송 의원은 18대 국회에서는 구 친박연대의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송영선 의원의 이 멘션은 급속히 유포되며 '북한 테러설'을 확산했다. 송영선 의원은 이후에도 재차 "전세계 IT 최강국 중 하나인 우리나라, 그러나 북한의 사이버테러에 대한 대처, 극도로 부실. 속수무책입니다. 사이버테러 능력 강화는 김정일의 2012년 강성대국화의 제1핵심사업 중 하나입니다. 우리보다 뛰어난 해킹부대, 전문가들을 2003년부터, 국가사업으로 키워왔습니다." 등의 멘션을 통해 정전사태가 북한에 의한 사이버테러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간 인터넷 공간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 유포되어 사회적 혼란과 갈등이 증폭된다며 이를 엄벌해야 한단 입장을 고수해왔던 정부와 한나라당 그리고 조중동이 어제 펼쳐진 송 의원의 활약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일지 주목된다.

▲ 정전사태에 대해 방송 뉴스는 '천재지변'을 강조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천재지변에 대한 재난 방송은 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일보는 국가 재난 주관 방송인 KBS가 황당하다며 힐난했다.
중도 우파의 실패 : 천재지변 강조한 방송 뉴스

사상 초유의 대규모 정전사태를 맞아 방송은 화면을 최대한 펼치는 데 주안점을 두는 보도방향을 택했다. 많게는 20꼭지까지 편성된 전력 사고 보도에서 방송 뉴스는 상황별, 사례별로 시민들이 어떤 불편을 겪었는지를 자세히 나열했다.

하지만 정작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고, 사고 발생 이후에 정부의 대응은 적절했으며 이번 사고의 책임 여부는 어떻게 가려야 하는 것인지와 같은 사회적 시선을 두는 데는 인색한 모습을 보였다. 사고의 원인에 대해서 역시 '수요 예측이 빗나갔다'는 정부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 '늦여름 무더위 때문'이라는 천재지변의 입장을 강조하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MBC <뉴스데스크>와 SBS <8시 뉴스>가 사고의 발생 원인과 정부의 대처가 적절했는지를 별도의 리포트로 편성했다. 반면 국가 재난 주관 방송사인 KBS의 경우, 정전 사고 관련 보도 개수도 가장 적었던 가운데 정부에 비판적인 코멘트가 전혀 삽입되지 않은 보도를 선보였다. 비단 뉴스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어제 KBS의 대응에 문제가 있었단 지적도 나왔다. 16일자 <조선일보>는 'KBS가 황당하다'는 입장과 함께 "국가 재난 주관 방송이 뉴스 특보 등도 없이 자막만 제공한 것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천재지변을 강조해 정부에 대한 비판을 밀어낸 셈인데, 정작 천재지변에 대한 재난 방송은 전혀 하지 않은 꼴이다.

중도좌파의 분노 : 달랑 서면 성명 한 장 내고 청와대에 밥 먹으로 간 최중경 장관

한국서부발전 사외이사를 지낸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는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이번 정전사태가 "최소한 두 가지 문제에서 정부가 거꾸로 갔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며, 그 요인을 "전기값 가격 관리의 실패"와 "도심 재개발을 강화하며 주상복합 등 고층 아파트에 자연환기가 아닌 강제 환기를 택한 토건적 요소"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정전사태의 주무부서인 지식경제부 최중경 장관은 사고 발생 5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서면'으로 사과 입장을 밝혔다. 그가 직접 기자들 앞에 서지 못한 이유는 청와대에 저녁을 먹으러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우 박사는 한국의 전기 시스템이 "수요관리 없이 공급을 급진적으로 늘려갈 요소만 잔뜩 쌓은 셈"이라며 이 상황을 '원전'을 맹신하는 '핵 마피아'들이 즐겼다고 비판했다. 우 박사는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의 사퇴와 한전의 고위층 인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청와대 인사라인을 경질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책 기조에 전반적인 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올 겨울에도 또 그냥 한전에서 아무 데나 차단 스위치를 내리게 된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어제 사상초유의 정전 대란 와중에 최중경 장관은 사고 발생 5시간이 지나서 달랑 서면으로 대국민사과 성명 한 장 발표하곤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만찬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날 만찬에 간 장관은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최 장관 단 둘 뿐이었는데, 전국이 정전의 '블랙아웃' 대혼란에 빠져 있는 와중에 장관은 유유히 대통령에게 '눈도장'을 찍으러 청와대로 달려간 셈이다.

좌익의 황망함 : 와중에 원전 늘리겠다는 꼼꼼하신 '가카'

정전사태에 대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SNS 등에서는 원인을 추론하는 갖가지 음모론이 횡행했다 그 가운데서도 높은 지지를 받았던 것이 국내 유일의 '가카' 헌정방송을 표방하고 있는 '세계 1위 방송' <나는 꼼수다>의 녹음이 있는 날이라는 점을 들어, '꼼꼼하신 가카가 <나는 꼼수다>의 녹음을 막기 위해 전기를 내린 것이 아니겠느냐'는 꼼수적 음모론이었다.

▲ 어제는 국내 유일의 '가카' 헌정 방송을 표방하고 있는 <나는 꼼수다>의 녹음이 있던 날이었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전사태에 갖가지 꼼수식 음모론이 횡행했다.

이러한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이 다음 주 뉴욕에서 열리는 UN총회에 참석해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은 더욱 확대돼야 한다"는 내용의 기조연설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이번 정전이 국내에 원전이 더 필요하단 점을 각인시키기 위한 가카의 세심한 배려가 아니냐는 음모론이 겹쳐졌다.

어찌되었건 음모론과는 별개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국제사회가 점진적으로 원천 폐쇄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과 가장 가까운 나라인 한국의 대통령이 원전확대를 주장하는 모양새가 나라 망신일 수 있단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청와대는 원전 확대로 "환경 보호와 지속가능한 발전이 달성될 수 있다"며 대통령의 연설로 한국이 국제사회의 "친 원전 진영에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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