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 가운데 하나인 세계육상선수권을 대구에서 치러낸 것은 개최지인 대구광역시 뿐 아니라 한국 자체적으로도 큰 도전이었습니다. 단일 종목 세계선수권 가운데 최대 규모인 대회를 처음 치르는데다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 치러냈기에 많은 우려, 걱정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회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시민들의 열정, 자신감 만큼은 정말 역대 최고 수준으로 대단했던 대회로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사실 대회 초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기록 흉작, 한국 선수들의 부진도 그랬지만 거의 다 팔린 줄 알았던 티켓 상황과는 다르게 텅 빈 좌석이 많아 대회 흥행에 찬물을 끼얹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컸던 게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안전 문제, 대회 운영 등에서도 허점이 노출되며 '전국체전보다 못한 대회'라는 비아냥까지 들었습니다. 그럴 만한 장면,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 대구 스타디움 (사진: 김지한)
그러나 이 같은 비아냥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의 매너 있는 응원, 수준 높은 관전 문화 덕분이었습니다. 육상 경기에서도 에티켓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수많은 관중들은 이에 동참했고, 단 한 번도 관중석에서 큰 사고를 내지 않으며 성공적인 대회 개최에 가장 큰 역할을 했습니다. IAAF(국제육상경기연맹) 한 관계자는 "기대 이상으로 한국인들이 육상을 제대로 잘 즐기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극찬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찾아갔던 3일에는 우사인 볼트가 남자 200m 결승 경기, 그리고 여자 높이뛰기와 남자 창던지기, 여자 100m 허들 등의 중요한 경기들이 열렸습니다. 그 때문이었는지 이른 시간부터 대구 스타디움에는 많은 관중들이 찾았습니다. 경기장 주변에 있던 다양한 즐길거리, 볼거리 등을 접하면서 어느 정도 분위기를 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경기 시작 전부터 축제 분위기가 펼쳐졌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대구 스타디움 장내 분위기도 점점 뜨거워졌고 마침내 저녁 세션(session)이 시작된 저녁 7시가 되면서 그 열기는 더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여자 높이뛰기가 먼저 시작되고 반대쪽 필드에서 남자 창던지기가 펼쳐지면서 관중들의 시선은 온통 그라운드로 쏠렸는데요. 어수선한 분위기보다 경기 자체에 집중하는 팬들의 시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매너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코치, 사진기자들이 앉아야 하는 자리에 무작정 앉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설령 앉았다 해도 자원봉사자의 양해를 구하는 설명을 들은 뒤에는 별 말 없이 다른 자리로 가서 앉았습니다. P,S석과 다르게 자유석으로 돼 있는 A,B석이었음에도 자리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지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은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파도타기 응원을 펼치는 관중들 (사진: 김지한)
장내 아나운서의 응원 유도에도 관중들은 의도한 이상의 엄청난 박수와 응원, 격려를 쏟아내며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에 큰 힘을 불어 넣었습니다. 선수가 박수를 치며 호응을 유도할 때는 박자에 맞춰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주는가 하면 열심히 달릴 때는 크게 환호하며 '화이팅'을 외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보았습니다. 또 언젠가부터는 누가 시키지 않고 자발적으로 파도타기 응원을 해서 몇 바퀴 이상을 돌 정도로 분위기를 더 후끈하게 했습니다. 그런 우리 관중들의 응원에 자메이카, 미국, 프랑스 등 멀리서 날아온 외국인 관중들도 덩달아 신나서 함께 즐기고 환호했습니다. 관중석에서만큼은 국경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날 열린 특별 경기 장애인 휠체어 육상에서도 팬들의 박수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거의 접해보지 못한 생소한 종목이었음에도 오히려 일반 종목보다 더 큰 박수를 쏟아냈습니다. 이에 선수들은 이러한 응원에 화답하듯 최선을 다 하는 플레이로 승부를 펼치며 화답했고, 소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특히 남자 T53 휠체어 400m 결승에서 2,3위를 차지한 선수로 한국의 유병훈, 정동호가 결정되자 관중 분위기는 극에 달했습니다. 번외 경기라 메달 집계에 포함되지는 않았어도 대구 스타디움에서 태극기가 시상대에 걸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최고'라면서 아낌없는 축하 격려를 쏟아냈습니다.

이러한 뜨거운 열기, 응원 덕분이었는지 선수들의 경기력은 거의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호주의 샐리 피어슨은 여자 100m 허들에서 대회 기록을 갈아치우고, 우사인 볼트는 남자 100m 실격 충격을 딛고 200m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또 미국은 1600m 여자 계주에서, 케냐는 1500m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해당 종목 강국다운 면모를 보였습니다. 볼트는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에서 "관중들이 너무 환호성을 보내줘 감사했다. 뛸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다"며 우승의 공을 관중들에게 돌리기도 했습니다.

▲ 휠체어 육상에서 메달이 나오자 많은 관중들이 크게 화답하고 있다(좌) 꽉 들어찬 대구 스타디움. 이같은 분위기는 마지막 경기인 남자 200m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우) (사진: 김지한)
경기가 끝난 뒤에도 매너 있는 관전 문화는 이어졌습니다. 경기장으로 가져온 쓰레기는 대부분 지정된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집에 가져갔습니다. 그렇다보니 관람석에 쓰레기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경기 직후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수거, 정리했어도 다 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쓰레기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경기 전부터 경기 후까지 대구 스타디움을 찾은 관중들은 '모범 관전 문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경기장에 함께 있던 국제육상경기연맹 관계자, 외신 기자들에 깊은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육상 영웅 칼 루이스가 자서전을 통해 "시끄러운 한국 관중의 매너가 최악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의 관전 문화는 처음부터 좋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을 통해 관전 문화가 몇 단계 발전됐고, 붉은악마 등을 통해 일사불란하고 조직적인 최고의 응원을 펼치면서도 매너를 지키는 세계 최고의 응원 문화를 갖춘 국가로 많은 나라들의 칭찬을 들을 정도가 됐습니다.

이번 대구 세계육상대회 역시 '육상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환경에서도 높은 시민 의식을 바탕으로 선수들에 제대로 된 경기를 펼칠 수 있도록 적극 힘쓰고 응원을 펼쳐 성공 개최에 큰 힘이 됐습니다. 한국 선수들의 성적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세계적인 선수들의 경기 하나하나를 즐기고 환호하는 것은 확실히 우리 관전 문화가 달라졌음을 알게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육상에 대한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낸 대구 스타디움을 찾은 우리 관중은 이번 대회 최고의 금메달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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