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우사인 볼트의 코믹한 세레머니도 아니고,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는 훈남, 빼어난 몸매를 가진 미녀 선수들도 아닌 '데일리 프로그램의 저주'입니다.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가 매일 그날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기록과 세계 기록 등이 담겨있는 일일 책자 '데일리 프로그램(Daily Programme)'을 제작하여 취재진이나 관객들의 편의를 돕고 있는데 이 데일리 프로그램의 표지 모델로 선정된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잇따라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표지모델의 저주'가 확산됐습니다.

첫날 남자 장대높이뛰기 챔피언 스티브 후커를 시작으로 다음날 남자 100m 세계기록 보유자 우사인 볼트, 그리고 셋째 날 남자 110m 허들 다이론 로블레스, 여자 장대높이뛰기 '미녀새' 옐레나 이신바예바가 4일 연속 표지 모델의 저주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메달권에도 진입하지 못하는 불운을 맛봐야 했는데요. 여자 20km 경보 올가 카니스키나가 대회 개막 5일 만에 단 한 번 깨기는 했지만 대회 6일째 곧바로 여자 세단뛰기 세계선수권 2연패자 야르게리스 샤비네가 우승에 실패하고 대회 7일째에는 2명의 미국 선수, 카멜리타 지터와 엘릭슨 펠릭스가 나란히 표지모델로 등장해 자메이카의 베로니카 캠벨 브라운에게 1위를 내주며 역시 2,3위의 쓴맛을 봐야만 했습니다. 이쯤 하면 가장 유명한 징크스인 '펠레의 저주' 이상의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대회 8일째 데일리 프로그램의 표지모델로 등장했던 여자 100m 허들 챔피언 샐리 피어슨은 독보적인 실력을 자랑한 끝에 우승에 성공하며 대회 5일째 표지모델이었던 카나스키나에 이어 두 번째로 저주를 깬 선수가 됐습니다. 우승을 차지한 뒤 샐리 피어슨은 3일자 데일리 프로그램 책자를 들어보이며 "나 저주 깼다"는 식으로 환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재미삼아 보는 것이라 할지라도 일종의 징크스, 저주에 민감한 선수들의 반응에서 어쨌든 이 '데일리 프로그램 저주'는 흥미로웠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 대구세계육상선수권 대회 8일째 데일리 프로그램 책자 표지모델이었던 여자 100m 허들 챔피언 호주의 샐리 피어슨. 하지만 그녀는 보기 좋게 징크스를 깨며 활짝 웃어보였다. (사진: 김지한)
피어슨이 데일리 프로그램 저주징크스를 깬 당일, 저는 경기장을 찾아가 관전하면서 데일리 프로그램 책자를 확보했습니다. 이 데일리 프로그램은 취재진 뿐 아니라 관람객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일반 매점에서도 1000원에 접할 수 있었는데요. '장안의 화제, 데일리 프로그램'이라는 문구를 매점 안에 붙일 정도로 나름대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책자를 살펴보니 전날 경기 리뷰, 경기 기록, 메달 순위 등 세계육상선수권 현황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이 있었는데요. 이것 하나만 있으면 세계육상선수권을 마스터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내용이 충실했습니다.

쭉 훑어보다 다시 보면서 눈에 띄었던 것은 역시 표지모델과 이날 경기 프리뷰 코너였습니다. 이날 경기에서 주목해야 할 선수가 누구인지 한국어, 영어로 따로 소개하고 있었는데요. 한국어에서는 여자 높이뛰기에서 블랑카 블라시치, 남자 200m에서는 월터 딕스, 남자 창던지기에서는 안드레아스 토르킬드센이 사진으로 장식돼 있었던 반면, 영어에서는 이와 다르게 여자 높이뛰기에서 안나 치체로바, 남자 200m에서는 우사인 볼트, 남자 창던지기에서는 데조르도가 나란히 소개돼 있었습니다. 블라시치, 토르킬드센은 이미 세계선수권을 차지한 경력이 있는 반면 딕스는 볼트에 이어 2위를 달렸다는 점에서 나란히 배치돼 소개됐던 것이 흥미롭게 여겨졌습니다. 반면 볼트는 100m 실격 여파 때문이었는지 한국어 다음 페이지에 있던 영어 부분에서 소개됐습니다. 남자 창던지기 데 조르도는 출전 선수 가운데 개인 기록, 시즌 최고 기록 모두 3위였음에도 영어 소개 부문에서 볼트와 함께 사진으로 실렸습니다.

▲ 데일리 프로그램 프리뷰. 한국어, 영어로 정리돼 있다.한국어 프리뷰에 소개된 블라시치, 딕스, 토르킬드센. 영어 프리뷰에 언급된 치체로바, 볼트, 데 조르도. 한국어에 소개된 선수들은 모두 2위에 오른 반면 영어에서 소개된 선수들은 모두 이날 우승했다. (사진:김지한)
그러나 샐리 피어슨이 표지모델 저주를 깼음에도 데일리 프로그램의 저주가 완벽하게 깨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한국어에서 언급된 선수 전원은 2위를 기록했던 반면 영어에서 언급된 선수 모두는 우승을 차지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세계선수권 3연패를 노렸던 여자 높이뛰기 블랑카 블라시치는 안나 치체로바의 벽을 결국 넘지 못했고, 세계선수권 연속 우승을 기대했던 남자 창던지기 1인자 토르킬드센 역시 실력 발휘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반면 데 조르도가 우승을 차지해 또 하나의 이변이 벌어졌습니다. 또 남자 200m에서는 100m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우사인 볼트가 딕스를 따돌리고 자메이카 단거리의 자존심을 세우며 크게 환호했습니다. 희한하게 나란히 정리돼 있던 선수들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데일리 프로그램'을 구성, 제작한 사람이 돗자리를 깔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멍하게만 느껴졌습니다.

▲ 남자 200m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한 우사인 볼트 (사진: 김지한)
이 모든 것이 가볍게 웃어넘길 일이고, 징크스가 어디에 있냐, 갖다 붙인 이야기이고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신기한 이 '데일리 프로그램의 저주'는 지난해 남아공월드컵의 '점쟁이 문어'에 이어 대구세계육상선수권하면 딱 떠오를 만한 아이템으로 자리잡았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이제 대회 폐막을 하루 앞둔 가운데, 데일리 프로그램의 저주가 마지막까지 '종결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줄지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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