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휴스턴, 여기는 고요의 바다. 곧 착륙합니다. 닐 암스트롱은 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 표면은 검푸른 바다 같았다.

어둠이 고요히 내려앉은 수면. 닐은 수없이 달을 상상했다. 무중력 적응 훈련을 할 때도, 체력 단련을 할 때도, 비상시 대비 훈련을 할 때도, 마치 애인처럼 문득 달은 생각났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여놓은 천체사진을 보며 상상했다. 달은 상상과 다르지 않았다. 상상과 다르지 않아 무서웠다. 검은 수면이 일렁였다. 오랜 시간 동안 고요히 침착된 어둠이 쌓여 단단한 지층을 이루고 있었다. 달은 주술에 걸려 긴긴 잠을 자고 있는 짐승이었다. 어둠은 짐승의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닐은 짐승을 깨우는 최초의 지구인이 자신이 아니기를 바랐다. 처음 계획은 그랬다. 달에 첫발을 내디디는 지구인은 닐이 아니라 버즈 올드린이었다. 그가 지구 역사에 영원히 남을 발자국을 달에 남길 계획이었다. 계획은 틀어졌다. 우주선 입구 쪽에 있는 사람은 닐이었으며 버즈 올드린이 그를 지나 입구를 통과하기에는 우주선이 좁았다. 별수 없이 계획은 수정되었다.

달 표면에 찍힌 버즈 올드린의 발자국 [출처 : 아폴로 프로젝트 아카이브(플리커)=연합뉴스]

1969년 아폴로 11호는 달에 착륙했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 흑백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었다. 우주복을 입은 닐이 지구인 최초로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닐이 남긴 발자국은 달이 소멸하지 않는 이상 없어지지 않는다. 달에는 물도, 공기도 없다. 물도, 공기도 없는 달은 지구인이 남긴 발자국을 지울 방법이 없다.

1992년 8월 25일, 닐 암스트롱이 죽었다. 심장질환 후 합병증 때문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 보았다.
바다, 그리고.

조카가 떡을 좋아한다. 일곱 살 때였다고 기억한다. 추석을 앞두고 있었다. 송편 빚고 싶어 아침 일찍 집에 와서 할머니(나에게 어머니)를 보채고 있었다. 나는 고모가 일어나야 떡을 빚을 수 있다는 말을 잠결에 들었다. 조카가 문을 열고 들어와 당장 일어나라고 떼를 썼다. 성화에 못 이겨 일어났다. 조카는 할머니와 떡방앗간에 다녀오기로 하고 나는 그동안 준비를 하기로 했다.

떡방앗간에 간다고 신이 난 조카를 보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그래서 조카에게 달토끼와 떡방앗간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떡방앗간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달에 살고 있는 토끼의 후손이라고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떡방앗간은 달토끼 후손들만 할 수 있는데 그들은 모두 달에서 내려왔다고. 조카는 눈이 동그래졌고 할머니 손을 끌고 떡방앗간에 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온 조카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조카는 조심스럽게 떡방앗간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아주머니, 달에서 내려왔죠? 달토끼 부족 사람이죠?’, 라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조카를 아주 이상한 아이 취급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조카를 불러 앞에 앉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달에서 내려왔으면 외계인이잖아. 외계인이 지구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람들이 가만두겠어? 방송국에서 찾아오고 기자들이 찾아오고 얼마나 귀찮겠어? 조카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달토끼 부족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 거야. 조카는 떡방앗간을 지나가면서 한동안 행복했다.

달에 달토끼가 살고 있고, 떡방앗간의 사람들은 달토끼 후손이라는 말을 믿었던 조카는 지금 대학생이 되었다. 물론 더는 달에 토끼가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달토끼는 멸종했다. 1969년 우리는 달에 사는 토끼를 멸종시켰다. 인간의 무한한 호기심이 우주선을 달로 쏘아 올렸다.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폐허가 되고 동식물이 멸종에 이르렀듯 달토끼도 다른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멸종되었다. 달에는 토끼 발자국 대신 닐의 발자국이 화석처럼 남았다. 닐의 발자국은 인간이 이룩한 찬란한 과학 발전의 긍지가 되었다. 달에는 토끼도, 바다도 없었다는 것을 다섯 살 꼬마도 알고 있다.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인간의 지적 호기심 때문에 달토끼는 멸종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달을 보고 소원을 빌고, 달은 여전히 은유적이며 아름답다. 그래서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당신은 토끼를 발견하게 된다. 토끼는 관리실 택배 상자 옆에 앉아 있다. 송편 상자를 가슴에 끌어안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택배 상자 옆에 다소곳이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다. 경비원 최 씨와 사이좋게 모시송편을 나눠 먹고 있다. 떡이 담긴 접시를 무릎에 올려놓고 다소곳이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최 씨가 끓여준 유자차를 양손에 꼭 쥐고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이 시간과 공간이 엇갈려 만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저런, 저런 또 못 만났네. 오 분만 일찍 오지. 아주 오래된 연인이야. 전생에 연인이었어. 최 씨는 토끼에게 지난 드라마 줄거리를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토끼는 모시송편을 한쪽 볼이 불룩해지도록 물고 운다. 빨간 눈동자가 더 빨개지도록 운다.

토끼는 당신을 기다린다. 토끼의 마지막 임무이다. 토끼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 당신에게 정성을 다해 빚은 모시송편을 주기 위해 달에서 내려왔다. 올 추석, 달토끼는 없지만 아직도 상상의 바다를 품고 있는 달을 보며 기도해 본다.

당신,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꼭.

김은희, 소설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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