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경기를 오랫동안 보아오면서 아쉬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렇다 할 '스토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982년 출범부터 다양한 기록, 역사를 보전해오며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어느 정도 갖춘 프로야구와 다르게 프로축구는 잇단 리그 제도 변경, 팀 연고 이전 등의 잦은 변화와 프로야구에 쏠린 언론들의 반응, 그리고 각 구단들의 소홀한 대응 때문에 기억에 남을 만 한 '스토리'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올드팬 개념도 그리 확고하지 않고, 흥행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게 사실입니다.

스토리라 하면 기억에 남을 명승부를 비롯해 특정한 연유로 발생하게 된 더비 매치, 선수 개인 활약상이나 이야기 등 경기 내적인 요소, 그리고 구단의 역사 같은 외적인 요소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K리그에서 뚜렷하게 기록, 역사 등 옛 것을 조명하고 기억하는 작업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설령 몇몇 전통 있는 구단에서 관련 사업, 노력을 했다 해도 많은 팬들에게 인식될 수준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유럽에 비해 짧은 역사이기는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는 공간이나 관련 행사가 거의 없다시피 한 현실을 확인할 때마다 "언젠가는 바뀌어야 할 텐데..."하는 탄식만 나올 뿐 이었습니다.

▲ 수원 빅버드 (사진:김지한)
20일 저녁, 수원 삼성이 '스토리'와 관련 있는 꽤 의미 있는 행사를 벌여 많은 팬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습니다. 바로 수원월드컵경기장의 애칭 '수원 빅버드' 입성 1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것입니다. 2001년 5월 완공돼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과 2002년 FIFA 월드컵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진 경기장이 된 수원 빅버드는 2001년 8월, 수원 삼성이 수원종합운동장 시대를 청산하고 입성한 뒤 꼭 10년 동안 홈경기장으로 사용하며 많은 추억을 남긴 곳이었습니다. 그 자랑스러웠던 10년을 돌아보고, 또 다른 10년을 그려보는 의미에서 이날 행사는 수원 팬들 뿐 아니라 K리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매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날 행사에 찾은 인사들부터 뭔가 다르긴 달랐습니다. 박선규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정몽규 프로축구연맹 총재가 경기장을 찾았는가 하면 수원 빅버드라는 애칭을 만들었던 30대 여성 이은경 씨를 수원 삼성 측이 초청해 시축 행사를 갖는 등 빅버드 입성 10년에 대한 의미를 한층 더 높일 만한 사람들이 대거 찾았습니다. 이 씨는 당시 월드컵 수원경기추진위원회에서 실시한 수원월드컵경기장 애칭 공모전에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새를 형상화한 경기장 지붕 이미지, 연고 구단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연상시키는 의미에서 만들게 됐다"면서 '수원 빅버드'라는 이름을 최초로 제안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수원 빅버드에서 선수 생활 은퇴를 한 서정원 현 축구대표팀 코치, 역시 선수 생활 은퇴와 함께 빅버드에서 결혼식을 올린 박건하 올림픽대표팀 코치가 자리를 빛내 후배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등 과거와 현재를 잇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수원 삼성의 엄연한 산하 구단인 연예인축구단 FC MEN 단장 JYJ 김준수가 경기장을 찾아 하프타임 때 공연을 한 뒤, 후반에는 직접 수원 서포터 그랑블루와 어우러져 응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통상 공연을 한 뒤 다른 스케줄 때문에 경기를 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김준수는 '수원 삼성 산하 팀 단장'답게 수원 서포터들과 함께 어우러져 응원을 해 많은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빅버드 10주년 행사라는 큰 의미만큼이나 엄청난 인사들이 찾았고, 그 덕에 어느 때보다 무게감도 느껴졌습니다. 10주년 경기를 찾아온 관중 역시 2만6천여 명으로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그야말로 양적으로, 질적으로 대단한 분위기였습니다.

▲ 대표팀에 뽑을 만한 선수를 점검하러 온 겸 '수원 후배'들의 경기를 관전하러 빅버드를 찾은 서정원 축구대표팀 코치와 박건하 올림픽대표팀 코치 (사진:김지한)
이날 수원 삼성은 구단 차원에서 꽤 많은 준비를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빅버드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미 수원은 지난 17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10주년 기념 유니폼을 공개하고, 염기훈, 정성룡, 곽희주, 오장은, 이용래 등 국가대표급 간판선수들을 모두 총출동시켜 팬 사인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가진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수들은 이날 10년 전 입었던 올드 유니폼을 그대로 입고 나와 경기장을 누볐습니다. 경기장 주변에서도 이 올드 유니폼이 판매돼 꽤 많은 팬들이 구매해서 입기도 했습니다.

경기 직전에는 '빅버드에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 10선'이 상영돼 팬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2008년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하늘에서 축복을 주는 듯한 눈발이 날렸던 순간, FC 바르셀로나와의 친선전을 승리로 장식했던 순간 등 지난 10년의 역사를 영상으로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거의 모든 관중들은 입장하면서 받은 응원 도구를 통해 수원 빅버드, 수원 삼성의 역사가 적힌 것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었으며, 기자들에 나눠준 보도자료에도 역시 이와 관련한 내용이 대거 정리돼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다른 팀에 비해 비교적 많은 수원 올드팬들은 진한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고, 많은 젊은 팬들은 빅버드 10년 역사를 통해 응원하는 팀에 대한 자부심을 얻을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 빅버드 10주년을 기념해 수원 삼성 측에서 만든 응원 도구. Thank You! Big Bird 라는 문구가 담겨 있다. (사진:김지한)
이런 의미 있는 경기를 수원 삼성이 '더 의미 있게' 잡아낸 것은 이날 경기 최고 하이라이트였습니다. 한때 침체기를 겪다 최근 가파른 상승세를 탄 수원은 상주 상무를 상대로 탄탄한 경기 운영을 펼치며 3-0 완승을 거두고 간만에 단독 4위까지 치고 올라서며 6강 진입 가능성을 한층 높였습니다. 순위 싸움이 점점 치열해 지고 있는 가운데서 거둔 승리여서 그 의미는 더 했고, 그것도 빅버드 10주년 기념 경기에서 거둔 승리였기에 팬들에 큰 기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경기가 끝난 뒤 벌이는 수원 삼성 특유의 세레머니인 '만세 삼창'은 어느 때보다 더 활력이 넘쳤고, 서포터 역시 더 큰 소리로 승리의 기분을 만끽했습니다.

수원 삼성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떠나 이날 경기는 여러 가지로 다른 팀들이 배워볼 만 한 요소들이 유독 많았던 경기였습니다. 통상 대다수 팀들은 홈경기장 입성은 물론 팀 창단 기념행사도 몇몇 소수 팬들만 불러서 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번 행사처럼 한 구단의 역사, 이야기가 담겨있는 구장 생일을 챙기고 그 속에서 구단의 의미, 정체성을 찾아내려 하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고 평가받을 만 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스토리텔링' 작업이 이뤄지고 팬층이 두텁게 형성된다면 유럽 축구 못지않은 '탄탄한 스토리'를 갖춘 팀, 리그로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특히 월드컵을 치를 만큼 뛰어난 시설을 갖춘 최고 수준의 경기장에 더욱 친숙히 다가가고, 그럼으로써 경기장 이익, 위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번 행사는 매우 인상 깊었으며, 주목할 만 한 행사였음에 틀림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수원 삼성 팬은 아니지만 가슴 뭉클했던 순간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수원 빅버드라는 애칭을 만든 이은경 씨가 "이렇게까지 널리 알려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할 만큼 빅버드는 수원 뿐 아니라 많은 축구팬들에 '수원월드컵경기장'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더 많이 사랑받는 수준으로 떠올랐습니다. 여기에는 팬들의 관심 뿐 아니라 구단 등 축구계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작용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러한 하나의 소재거리를 갖고 잘 활용하여 팬들의 관심을 끌고 재미와 즐거움, 감동과 추억을 떠올리게 했을 때, 그리고 이것이 더 확산돼 하나의 큰 문화로 자리잡을 때, K리그는 '최고의 프로 스포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경기 외적으로 많은 가능성과 희망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던 '빅버드 10주년 기념행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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