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전시를 가면 자동차만큼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늘씬하고 자극적 포즈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레이싱 퀸이 바로 그것. 심지어 고급 카메라를 가져와서는 차는 안중에도 없고 레이싱 퀸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무리 슈퍼카의 디자인이 훌륭하다고 해도 전시장에서 남자의 가슴을 먼저 움직이게 하는 것은 레이싱 퀸의 미소가 먼저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동차들에 시동이 켜지기 전까지만 유효한 일이다.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고 귀를 자극하는 굉음과 함께 질주를 시작하게 되면 그것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부러움과 질시로 뒤섞이게 된다. 절세미인이라도 그 시선을 돌리게 할 수는 없다. 강남 한복판을 질주하는 스포츠카를 발견된다면 대부분의 남자는 일단 부정적인 말부터 한다. 민폐라니, 한국 도로 실정에 무의미하다는 등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그 차를 모는 드라이버가 자신이라면 입장은 또 백팔십도 달라질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한국에서 슈퍼카를 대하는 남자들의 이중성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후자는 아주 특별한 부유층에만 주어진다. 아무리 싼(?) 것을 골라도 1억대인 이 차들은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스포츠카에 대해서 냉소적인 태도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낡은 내 차 옆을 빠르게 추월하는 스포츠카의 머플러 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귓전에 맴돌며 묻어두었던 욕망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남자에게는 빠르고 위험한 것에 이끌리는 본능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런 남자들의 욕망을 대신해서 만족시켜줄 것이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XTM에서 김갑수, 김진표, 연정훈 세 남자를 MC로 해서 시작한 BBC 포맷의 톱기어 코리아가 20일 첫 방송을 내보내며 야심찬 출발을 알렸다. 비록 내 차로 만들 수는 없어도 고작 스펙만 알 수 있었던 꿈의 자동차들의 속을 시원하게 들여다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자동차의 본질은 달리는 것이고 모든 달리는 것들의 본능은 경쟁이다. 톱기어 코리아 역시 아주 다양한 경쟁을 통해서 자동차들의 성능을 실감케 해준다. 예컨대 방송 막이 오르고 곧바로 국산 수제차 스피라, 영국 로터스 엑시즈 그리고 스포츠카의 대중스타 포르쉐 카이맨 등을 성능을 스펙에서 도로로 꺼내와 보여주었다. 먼저 한 것은 400M 직선도로를 질주하는 드래그 레이스. 여기서는 스피라가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스피라는 서키트 주행에서는 아쉽게도 코너링에서 레인을 이탈해 기록을 잴 수도 없이 수리 후 다시 시도하기로 했다. 국산의 자존심은 다음 주에나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다음으로 현직 레이서 김진표의 활약 혹은 고생이 돋보였던 집중탐구는 도로의 작고 비싼 차 미니를 파고들었다. 국산 대형차 가격과 맞먹는 이 소형차의 매력이 무엇인가 그 실체를 밝히기 위해 김진표는 오프로드에서 추진기를 단 패러글라이더와 대결을 벌였다. 따로 길이 없는 패러글라이더와의 대결은 한편 어이없기도 하거니와 이 역시 남자와 자동차의 본능인 위험과 스피드에 충실한 것이었다. 결과는 아쉽게도 오프로드를 질주하다가 펑크가 난 탓인지 패러글라이더를 이기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대결 자체는 흥미로웠다.

톱기어의 발칙한 상상은 자동차와 패러글라이딩의 대결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우스갯소리나 다름없는 자동차, 비행기, KTX의 대결로도 이어졌다. 술자리를 갖다보면 흔히들 엉뚱한 소재로 옥신각신하기 마련이다. 그중 흔한 것이 서울서 부산까지 무엇이 가장 빠르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말로만 다툴 뿐이지 그것을 굳이 증명할 사람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 증명에 톱기어가 나섰다. 이쯤에서 이 프로그램이 예능인 것을 뒤늦게 자각할 수 있었다.

잠실에서 3MC는 각자 미션지를 뽑아 연정훈은 아우디 R8을 타고 부산으로 출발했고, 김갑수는 택시와 KTX를, 김진표는 공항버스와 경비행기를 타고 경주를 시작했다. 세 명이 출발했지만 역시나 관심은 연정훈이 달리는 경부고속도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대결이 벌어지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과연 우리나라 고속도로가 경주에 적합하지 않다는 현실적인 문제다. 수십만 원의 범칙금을 낼 각오를 했다면 몰라도 규정속도 110의 고속도로에서는 아무리 아우디 슈퍼카라 할지라도 본능을 억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우토반이 없는 대한민국의 실정상 사실 이 대결은 무효다. 그렇지만 예능의 모토는 그래도 해본다에 있듯이 톱기어는 무모하거나 혹은 무의미한 대결을 끝까지 했다는 것이 이제는 사라진 호기심천국을 다시 보는 느낌을 주었다.

빠른 화면과 베이스가 묵직한 소리가 가득한 톱기어를 글로 표현하기는 대단히 적합지 않다. 또한 예능이라고 하면 흔히 웃기는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인데, 톱기어는 그다지 웃을 대목은 많지 않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좀 더 몰입하면 침을 흘릴지도 모를 일이다. 톱기어는 묵혀두었던 남자의 본능을 자극한다. 매주 한 번 톱기어 때문에 미칠 것 같은 밤을 맞게 될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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