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슬 사태가 일단락됐다. 한예슬이 급히 귀국하여 KBS측에 사과를 건네고, 황인혁PD와 악수를 하며 안 좋았던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으며, 자신이 교만했다고 인정하고 시청자들에게 깊이 사과를 드린다고 밝혔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깔끔한 대처였다.

처음에는 한예슬의 행동에 분명한 잘못이 있다고 여겼다. 아무리 열악한 제작환경이라도 배우로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다른 대응 방식을 찾아봐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를 들어 단독행동을 하지 말고 다른 배우들과 뜻을 함께한다거나, 혹은 연예인협회를 통해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더 좋은 대응 방안이라고 여겼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사건을 통해 '배우 혹은 연예인'들이 얼마나 자신의 동료를 지키는 데 인색한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 '스파이 명월'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배우 한예슬 ⓒ연합뉴스
한예슬의 촬영장 이탈은 분명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한다. 스태프들은 나름 여러 가지로 배려를 했다고 하지만 가만히 보면 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누구보다 더 배려했다, 누구보다 더 쉬었다.'

그러면 'A씨는 1시간 잤는데, 너는 2시간 잤으니 당신은 배려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논리가 통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된다. 분명한 건 제작환경이 열악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스파이명월'의 제작환경만 열악한 것이 아니라 다른 드라마의 촬영장 또한 거의 비슷한 분위기라는 것을 다른 배우들의 증언, 그리고 지금껏 나왔던 수많은 관련기사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동료 배우들은 적극적으로 한예슬을 보호하는 것이 맞다. 왜냐면 그들 또한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그저 자신만을 위한 행동이었건 아니면 대의를 위한 것이었건 그녀가 총대를 멘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작이야 어떠했든 그녀는 '후배들을 위해서'라고 분명히 자기 행동에 '명분'을 부여했다. 그렇다면 똑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는 동료 배우들이 그녀를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데 배우들은 그저 그녀에게 '이해하나 아쉽다'는 식으로 살짝 다리만 걸치거나, 대선배님들도 가만히 계시는데 감히 나서기가 애매하다는 식으로 말을 돌릴 뿐, 누구 하나 나서서 옹호해주지 못했다. 그저 '양동근' 한 사람 정도가 한예슬을 옹호에 주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배우들과 상의를 하고 공동대응을 한다든가, 연예인협회에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방식이 과연 가능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남아있는 대응책은 촬영중단 밖에 없다. 이건 출연료와 상관없는 생존의 문제다. 일부는 돈을 많이 받으니 참으라고 하지만 사람이 하루라도 잠을 못 자고 계속해서 일을 하다 보면 이러다 쓰러져 죽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상황에서 촬영 환경의 개선을 요청해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한예슬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극단적인 방법뿐이 없었을 것이다.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박중훈이 '황산벌'을 촬영할 당시 '연속 6일 이상 촬영 요구 불가, 하루에 12시간 이상 촬영 금지, 촬영 후 12시간의 휴식시간 보장, 촬영 시작일로부터 3개월 안에 촬영 종료'를 한다는 계약을 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이 '프리프러덕션 과정을 중요시하고', '안정된 촬영 현장'을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많은 스태프들은 음지에서 일하며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노고와 희생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수많은 스포트라이트와 거액의 출연료를 받는 것은 연기자이고 스타이다. 그러므로 한예슬이 아니꼽게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나는 더 적은 돈 받고 이렇게 일하는데 너는 뭐가 불만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건 논점에서 빗겨난 문제이다.

논점은 스태프들 또한 말도 안 되는 노동시간을 강요받고 있고, 그것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나도 못 잤는데 너는 돈도 많이 받고 이렇게 배려도 받으면서 뭘 그리 불평이 많아!’가 되면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이번 사건을 계기로 스태프들이 촬영현장의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개선을 요구했다면, 제작환경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여론몰이가 됐을지 모르고, 실제로 제작환경이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것을 보면, 그들은 그냥 현재의 처우에 만족하고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모든 스태프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한예슬이 잘못을 인정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사과하겠다는 의사표명을 한 후에도, 스파이명월팀은 한예슬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스태프와 배우가 연합해서 '한예슬 사건 전모' 성명을 발표했고, 드라마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임을 지고 있는 황인혁PD는 사과 한마디 발표하지 않았다. 결국 한예슬이 눈물 흘리며 사죄하고 잘못했다 말하고 나서야, 제작진은 '철없는 배우'의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며 용서(?)해주는 분위기였다.

이 사건에서 가장 용감했던 이는 누구일까? 나는 한예슬이라고 본다. 그 방법에 있어서 분명히 잘못한 것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사과 전화를 하고, 온갖 비난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용서를 빌고, 제작진에게 눈물로 사과했다. 그리고 자신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봐 주지 않을 것이 확실한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이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한 개인'의 문제로 논점을 흐리고, 순간적인 자기 자신의 기분에 취해 정작 자기 자신에게 앞으로 중요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지 못했던, 그래서 모든 잘못을 그저 한예슬 개인만의 것으로 몰아간 다른 이들의 모습은 안타깝다. 만약 이 일을 한예슬 혼자만의 잘못으로 여기고 넘겨버린다면, 여러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계속해서 살인적인 스케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언젠가 정말 과로로 쓰러져 사망할 배우나 스태프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게 될 것이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제작환경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하고, 이에 따른 합당한 개선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 사건의 핵심은 한 개인의 철없는 행동이 아니라 상식을 넘어선 제작환경에 있다. 제작환경의 질적 개선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문화칼럼니스트, 블로그 http://trjsee.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문화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화 예찬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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