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을 기대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오리지널로부터 40년도 더 지난 시점에 속편이 제작된 건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이미 <월 스트리트 2, 인디아나 존스 4> 등이 오랜만에 시리즈의 명맥을 잇고자 속편으로 제작된 선례가 있으니까요. 개봉 전부터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건, 10년 전에 팀 버튼이 리메이크했던 <혹성탈출>이 졸작으로 전락했던 탓이 컸습니다. 실망할 대로 실망해 제아무리 단순 리메이크가 아닌 프리퀄이라 하더라도 나아질 게 없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할리우드의 뻔뻔한 수작으로 여겼죠.

할리우드의 반응도 시원치 않았는지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제작과정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혹성탈출>의 혈통을 뒤따르게 될 새로운 작품이 제작될 것이란 소식을 처음 들은 게 2008년입니다. 하지만 그 후로 좀처럼 이 영화는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고, 감독마저 물색하지 못하면서 고사 위기에 놓였습니다. 가까스로 2010년이 되어서야 루퍼트 와이어트에게 연출을 맡겼습니다. 그나마 그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감독이었죠. 중간에 제목은 <Caeser>에서 지금의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로 변경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소식은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조차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기획단계부터 고전을 면치 못한 끝에 할리우드에서의 경험은 전무한 감독에게 영화를 맡겼으니, 이건 뭐 폭스가 될 대로 돼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한 건 아닌지 의구심마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의외로 괜찮습니다. 적어도 자기 몫은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오리지널의 초기로 돌아가는 영화는 '리부트'와 '프리퀄'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리부트는 전작을 엎고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를 지칭합니다. 단 주요 설정과 세계관, 캐릭터는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오리지널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갑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가 대표적이죠. 그런가 하면 새롭게 재해석이 가해지는 리부트와 달리 프리퀄은 속편으로서의 기능에 보다 충실합니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 에피소드 1~3>가 그랬던 것처럼 원전이 되는 영화의 이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죠. 일종의 창세기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이 두 가지를 한 편에 담은 자웅동체입니다. 일찍이 <007 카지노 로얄,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가 그랬던 것처럼 프리퀄인 동시에 리부트고 리부트인 동시에 프리퀄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해서 원숭이에 의해 지배받게 되는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는 프리퀄입니다. 반면 동일선상에 머무는 이야기지만 기존에 갖춰졌던 틀을 일부 해체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재조립한다는 면에서는 리부트입니다.

만약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을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눠 평가하라면 프리퀄로서의 기능에 좀 더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오리지널을 본 사람에게는 굉장히 친절하게 느껴질 만큼 모든 일의 기원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거든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을 보는 관객들은 기존 시리즈에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던, 지능을 갖춘 원숭이의 탄생에 얽힌 사연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와 더불어 왜 인간은 원숭이의 지배를 받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과정까지 과학적,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특히 후자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입니다.

원숭이의 지능이 아무리 높아진다 한들 인간의 적수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물론 맨몸으로 맞붙는다면야 그 반대지만, 최첨단 무기가 넘쳐나는 작금에서 원숭이가 인간을 꺾고 세상을 지배한다는 논리를 사용했다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그걸 알고 있었는지 나름 슬기롭게 헤쳐나갑니다.

이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의 리부트적인 측면입니다. 즉 원숭이가 고도의 지능을 갖춘 존재로 격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혹성탈출>의 프리퀄이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냐 그리고 극의 중심에 놓은 주제와 몇몇 설정 등은 리부트로서의 역할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혹성탈출 시리즈에 제작 당시의 현재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이미 있었습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이를 포함하여 오리지널이 갖췄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대신에 일부 수정을 가했습니다. '시저'라는 이름의 원숭이가 등장하지만 오리지널과는 같으면서도 다른 캐릭터라거나, 핵전쟁에 대한 경고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려는 인간의 오만함과 과학에 대한 맹신을 향한 것 등이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오리지널의 프리퀄이라고 간주하기 힘든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동일한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리부트 영화에 가깝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지널을 보지 못한 관객에게는 다소 흥미가 떨어질 수 있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시리즈의 기원을 다루는 설명적인 영화에 가깝거든요. 또는 이제 막 새롭게 시작하는 시리즈의 주춧돌 역할을 하는 영화라 현재보다 미래를 더 기다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리부트라고는 하지만 독립적인 영화로서 기능하기엔 조금 부족합니다. 오리지널의 향수가 스민 부분도 있어 아무래도 <혹성탈출>을 본 관객이 더 흥미를 느끼게 될 것 같습니다. '시저'가 인간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는 과정의 묘사에 개연성은 있지만 충분한 설득력이나 호소력을 갖추지 못한 것, 주요 인간 캐릭터는 실질적으로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한 것 역시 아쉽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리지널을 보지 못한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네요.

★★★★

덧 1) 퍼포먼스 캡쳐를 활용한 CG의 퀄리티는 믿기 힘든 경지에 다다랐습니다. 단순히 퀄리티만 훌륭한 게 아니라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하이테크놀로지가 영화에 어떻게 쓰여야 하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덧 2) 영화를 보고 나서 지금쯤 앤디 서키스의 몸값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졌습니다. 웬만한 배우랑 맞먹겠죠?

덧 3) 오리지널과 동일한 상황에서 입장만 바뀐 장면이 몇 있어 '인과응보'라는 사자성어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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