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난리의 진상이 아직 완벽하게 밝혀지지는 않은 상태에서 섣부르게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진다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정리를 해 놓지 않으면 이 사건은 점점 더 부풀려져만 갈 것이므로 일단 현재까지 드러난 상황 안에서 잘못을 따져보고자 한다. 잘한 점은 차치하고 오직 잘못만을 따지는 것은 이 사건에서 잘한 사람이나 집단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1. 한예슬의 잘못

일단 한예슬은 촬영을 펑크낸 것, 그 이후에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이 잘못이 타당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 때는 제작진이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서 불법적인 일을 강요받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러나 한예슬 정도의 스타가 그런 일을 강요받았으리라고는 쉽게 예측하기 힘들다. 그래서 일단 이 가정은 제외하고자 한다.

▲ KBS 드라마 촬영에 불참한 뒤 미국으로 떠난 배우 한예슬 씨가 16일 오전 로스앤젤레스 공항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2011.8.16 << 한국일보 제공 >>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한예슬의 촬영거부 및 출국은 명백히 잘못한 일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일을 하는 환경이 너무나 열악하고, 거기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는데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거 아니냐?'

물론 이 말은 맞다. 하지만 한예슬은 신인배우도 아니고 이미 여러 번 드라마를 촬영한 경험이 있는 배우이다. 한국의 드라마제작환경이 어떤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면, 사전에 제작진과 협의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서 갑자기 제작환경이 변하고 과다한 촬영스케줄에 힘이 들었다면 그때는 다른 연기자들과 상의하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연기자들이 어느 정도 합의를 한 상황이라면 이번 사건은 다른 방식으로 비춰졌을지 모른다.

후배들이 좀 더 좋은 제작환경에서 일했으면 한다는 그녀의 말을 통해 인지도 있는 스타가 자기 앞길을 포기하고 후배들을 위해 길을 열어준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방식이 용납될 수는 없다.

과거 박중훈은 '황산벌'을 찍으면서 '연속 6일 이상 촬영 요구 불가, 하루에 12시간 이상 촬영 금지, 촬영 후 12시간의 휴식시간 보장, 촬영 시작일로부터 3개월 안에 촬영종료'를 한다는 계약을 했다.

그는 이것이 헐리우드 시스템의 모방이라든지 자기 자신의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제작 전 프리프러덕션 과정을 중요시하고 안정된 촬영현장을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계약을 통해 스태프들과 여러 연기자들 또한 조금 더 쾌적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영화와 드라마의 제작 환경은 또 다르다. 하지만 과다한 촬영 일정이 무리였다면 저런 식으로 미리 제한을 해놓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드라마, 연기자 협회 측에 요구해서 조금 더 나은 제작환경 구축을 위해 총대를 메는 일도 가능했을 것이다. 미리가 불가능했다면 촬영이 끝나고 나서 말이다. 진실로 제작환경의 문제였다면,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 제작진의 잘못

제작진은, 특히 연출자는 모든 스태프를 비롯해 연기자까지 아울러야 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한예슬이 아무리 스타라 해도 연출자의 지휘에 따라야 하는 연기자다. 그렇다면 연기자를 잘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연출자에게는 있다. 충돌이 일어나는 부분은 설득하고 배려하고 편의를 봐주는 식으로 좋은 작품을 위해서 최대한 조율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제작진에게도 문제는 있다.

또한 한예슬이 촬영을 펑크 냈을 때, 그 부분에 대한 처리부분도 원만하지 않았다. 마치 한예슬을 사지로 몰아가듯 처음부터 한예슬이 방송촬영에 불성실하다는 기사가 꾸준히 노출되었다. 정말로 한예슬이라는 배우와 함께 작품을 잘 만들어 보고자 했다면 설령 한예슬이 펑크를 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한예슬의 잘못으로 하는 내용의 기사가 나왔을 때 제작진에서 적극적으로 해명을 해줬어야 했다.

한예슬이 정말로 아파서 혹은 정말로 뻗어버려서 촬영에 늦어버린 거라면, 그리고 제작진이 적극적으로 그 부분을 옹호해주지 않은 거라면 한예슬은 충분히 제작진에 대해 실망하거나 불신했을 수 있다.

특히 제작환경의 문제는 우리나라 드라마 촬영의 고질적인 병폐로 반드시 고쳐지고 수정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쪽대본 스타일이 갖는 장점은 있다. 바로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기 있는 캐릭터의 비중을 높이고 시청자가 좋아할만한 결론을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쪽대본은 확실히 매력이 있다. 그러나 쪽대본은 반대로 심각한 작품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싸인'같은 경우 훌륭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지만 중간에 분량이 늘어나면서 연출을 담당했던 장항준감독이 시나리오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결국 급하게 촬영을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마지막회에 발생한 심각한 방송사고로 드러났다. 큰 인기를 얻었던 '시크릿 가든'의 마지막회에서도 중요했던 콘서트 장면에서 음향사고가 났었다.

이렇게 쪽 대본 스타일의 제작환경은 작품의 질 저하를 가져올 개연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러한 제작환경을 개선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 배우들이 링거를 맞으면서 촬영하는 것이 투혼을 발휘하는 멋진 일이 아니라, 혹사당하고 있는 거라는 인식 그러므로 충분히 납득 가능한 그리고 개선된 제작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빠르게 형성되어야만 한다.


3. 소속사의 잘못

배우와 제작진간의 문제가 있었다면, 혹은 그 외 촬영장에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조정하고 소속배우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소속사의 몫이다. 그러나 소속사는 그 역할을 잘하지 못했다. 계약이 마무리 될 시점이라서 그러는 것 아니냐는 루머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일단 매니지먼트 계약을 하고 있는 이상 소속 배우를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예슬이 촬영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해외로 나갈 정도로 소속연예인이 방치되었다는 점은 분명한 소속사의 잘못이다. 물론 한예슬 정도 되는 연예인을 어떻게 하겠냐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소속 배우와 그 정도의 의사소통도 안 된다면 그 또한 소속사의 역량부족이라고 볼 수 있다.

한예슬 사태는 스파이 명월 초반부터 떡밥이 던져졌던 이야기였다. 갑자기 터진 게 아니라 한예슬과 제작진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부터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단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소속사였다. 그러나 그러질 못했다.

소속사는 제작진과 한예슬 사이의 입장차를 원활하게 해결, 조율하지 못했다. 진정으로 소속사 능력의 한계였던 것인지, 아니면 한예슬이 상상 이상의 안하무인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제작진이 한예슬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다. 그러나 확실한 건 소속사의 역할을 확실하게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사건은 모두가 잘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렇게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고치는 것이 순리다. 일단 한예슬은 돌아와서 촬영에 임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녀가 돌아온다는 것은 떠났을 때보다 몇 배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아마 수많은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을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녀는 돌아오기로 했고 다시 촬영에 임하기로 했다. 그녀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시청자와 제작진, 동료 배우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한예슬은 일단 잘못한 것을 되돌린 것이 될 것이다.

제작진도 잘못된 점을 고쳐야 할 것이다. 전체 제작환경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스파이명월'의 제작 환경만큼은 분명히 바꿀 수 있다. 출연배우와의 갈등도 조율하고 환경도 납득 가능할 수준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소속사 또한 더욱 철저하게 이후에 있을 여러 가지 송사를 잘 마무리할 필요가 있다. 소송이 들어가게 되면 그 부분을 잘 막아내고, 제작진과 한예슬이 원활하게 촬영할 수 있도록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들이 이제 소속사가 해야 할 일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한예슬, 제작진, 소속사는 모두 시청자에게 사과해야 한다. 비록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니었지만 스파이명월을 즐겨보는 시청자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분들에게 지금과 같은 상황에 대해 사과하고 더욱 좋은 작품으로 뒤를 잇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왜냐면 시청자와의 약속이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칼럼니스트, 블로그 http://trjsee.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문화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화 예찬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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