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폭동과 반란이 유행이라도 하듯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비롯해 이스라엘, 칠레 그리고 영국에서도 난리가 아니다. 비슷한 현상이지만 폭동의 근원을 찾는데 언론들은 상당히 다른 방식을 선택한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언론들은 이를 억압된 시민들의 분노폭발과 민주화운동으로 단정하고, 부패한 독재정권에 대한 처단이 불가피하고 강조했다. 특히 반서구정권인 리비아의 카다피는 사담 후세인처럼 마땅히 제거되어야 올해의 인물로 악마의 전형으로 낙인찍혀 국제적 처단에 돌입했다. 유엔과 나토의 군사적 개입이다.

특히 리비아 군사적 개입에 적극 찬성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의 언론들은 리비아 사태를 ‘시민들을 억압하는 잔인한 독재자 카다피’와 ‘인도주의적 서구세계’의 상반된 모습으로 보도하는 경향이 짙었다. 물론 은밀한 거래와 독재자들을 도왔던 서방국가들의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비판은 전무하고, 이슬람국가들의 정치실패와 독재자의 책임만이 언론에선 크게 부각됐다. 더불어 소셜 미디어가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민주화를 이끌어냈다는 과장도 서슴없이 나왔다.

무대를 유럽으로 옮겨 영국의 폭동사례를 한번 보자. 영국언론과 세계의 주요 언론들이 청소년들의 약탈과 방화 등 파괴적인 장면을 연일 보도했지만, 정작 원인규명에 대해선 부족한 점들이 많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경우와는 달리 영국폭동의 핵심원인인 정치의 실패에 대해선 거의 모르는 일처럼 취급했다. 영국폭동의 원인을 영국정부와 마찬가지로 주류 언론들도 청소년들의 행위자체에서 찾고, 폭력의 책임 또한 ‘생각 없는 폭도들’인 청소년들에게 묻고 있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폭동의 책임을 ‘흑인문화’와 ‘소셜 미디어’에서도 찾고 있다는 점이다.

▲ 문제가 된 BBC Newsnight 캡쳐. 토론 참석자로 나온 David Starkey(왼쪽)가 흑인문화를 영국폭동의 원인으로 매도하고 있다.
“백인들이 흑인이 되었다”

역사가이며 방송인인 데이비드 스타키(David Starkey)는 BBC2 Newsnight 토론프로에 나와 영국의 폭동문제를 이렇게 진단했다.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일까? 그의 주장은 흑인문화의 영향으로 영국문화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한다면 다문화사회인 영국에서, 특히 구식민지인 아프리카지역의 이주민이 많은 영국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야 당연한데 말이다. 문제는 그의 주장에는 인종주의적인 편견이 섞여있다는데 있다. 그가 말하는 ‘블랙(black)’의 의미는 흑인문화로 갱스터문화, 즉 흑인문화를 범죄와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키는 토론에서 영국폭동의 원인이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며, 허무주의적인 갱스터문화”, 즉 흑인문화에 있다고 매도했다. 백인청소년문화인 채브(chav)와 폭력적 흑인갱스터문화가 합쳐져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졌고, 이런 흑인문화가 영국에서 유행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흑인문화가 영국폭동의 근본원인이라는 논리다. 그렇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영국문화에 ‘악영향’을 끼친 그가 말하는 ‘흑인문화’를 영국 땅에서 내몰아야 하지 않겠는가? 극우파들은 사회경제적 문제와 정치실패를 이슬람이나 이주민 책임으로 돌리는 데 이력이 나 있다. 비열하고 위험한 발상이다.

▲ 채브(chav)의 전형적 모습. 출처: Charl/Wikipedia
영국의 십대를 비롯한 청소년문화인 ‘채브(chav)'는 노동자계급 배경의 주변문화로 상업주의와 혼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아디다스, 푸마, 나이키 등과 버버리 같은 유명브랜드의 옷과 캡을 쓴, 스킨헤드나 짧은 머리에 문신을 새긴 공격적이고 ’삐딱한‘ 청소년들의 모습이 전형적인 채브 스타일이다. 길거리에서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하고, 반사회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를 일삼는 난폭한 청소년문화를 일컫는다. 영국에선 드문 관경이 아니다.

이런 반사회적인 청소년문화가 흑인문화, 즉 파괴적 갱스터문화의 영향으로 폭동까지 일으켰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천대받는 노동자계급, 워킹클래스(working class)에 차별받는 흑인문화의 ’혼합폭동‘이니 스타키 같은 상위층계급, 하이클래스(highclass)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개념 없는 폭도들‘일 뿐이다. 백인청소년들이 폭동사태에 관련되어 있어 단순히 이슬람이나 이주민공동체로 책임으로 떠넘길 수는 없고, 이젠 흑인문화가 원인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등장시킨 것이다. 스타키는 ’피부색‘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가 문제라며 문화를 강조했지만, 인종주의자란 비난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흑인문화‘란 하나의 동질한 문화는 존재하지 않지만 이런 황당한 매도에 찬동하는 네티즌들도 적지 않아 안타깝다.

사회경제적으로 불평등한 계층문제를 정치가 아닌 타문화와 타종교 탓으로 돌리는 것이 이젠 극우파정치인들이나 인종주의자들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유행이다. 극우파 논리의 핵심은 문화와 종교를 함께 지니고 들어온 사람들, 즉 이주민 문제인 것이다. 유럽의 극우파들이 내세우는 이주민통제정책의 필요성이 이렇게 강조된다. 이는 유럽의 극우정치인들의 판에 박힌 논리로 영국에선 이런 정치선전을 길거리 전광판에서도 읽을 수 있다.

영국은 유럽국가 중에서 사회경제적 계급이 가장 분명하게 존재하는 곳이다. 미국과 함께 세계화의 선봉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앞장선 나라가 영국이다. 빈부의 격차와 계층 간의 골이 더욱 극심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불러온 극심한 빈부의 격차는 오래전부터 반세계화운동가들이 경고한 것이며, 계층 간의 갈등과 사회적 불안의 증가는 예상된 일이다. 또한 9.11사태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및 이락전쟁과 리비아 군사개입, 또 금융위기로 인한 구제자금까지 국가재정은 시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지출됐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캐머런 보수주의 정부는 정책실패의 책임은 회피하고, 모든 책임을 폭동에 가담한 청소년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폭동가담 청소년들의 가정을 공공주택에서 내쫓기까지 하며, 폭도들에게 복지혜택은 없다며 국가의 힘을 보여준다. 영국은 아예 ‘폭도진압’을 위해 경험이 많은 미국의 전 뉴욕경찰의 도움까지 요청하며 강경대응하고 나섰다. 언론은 영국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폭도들의 행위를 지탄하며 거리를 청소하는 ‘착한시민’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영국의 사태를 보면 2005년 프랑스 교외에서 3주간에 걸쳐 진행됐던 폭동사태와 비슷한 면이 있다. 르몽드는 영국이 이번사태를 정치적이 아닌 단순히 ‘개념 없는 흉악범들(mindless thugs)’의 소행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경험을 교훈삼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프랑스 폭동사태는 파리근교에서 사망한 두 명의 이주민 청소년들로 시작된다. 프랑스의 게토라고 할 수 있는 북아프리카 이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파리근교 빈민지역구에서 발발해 여러 지역으로 번져간 사건이었다. 축구를 하고 있었던 청소년들 검문과정에서 경찰들의 과잉추격이 벌어졌다. 이를 시작으로 높은 실업률, 희망 없는 미래에 대한 좌절감과 이주민 청소년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경찰의 차별과 잔인성에 대한 분노가 더해져 폭발했다. 이에 리콜라스 사르코지의 강경대응이 사태를 더욱 심각한 지경으로 내몰았다.

▲ 런던 근교에서 아이들이 인종에 관계없이 공을 차며 놀고 있다. 사진출처: 한수경/마이그린뉴스

경찰들의 흑인들 및 이주민들에 대한 경찰들의 검문은 백인청소년들보다 훨씬 높다. 영국에서 흑인들은 백인에 비해 7배나 더 자주 검문을 당한다. 폭동의 발단도 자녀를 4명을 둔 29세의 마크 더건이 경찰의 총에 맞고 사망한 것으로 시작됐다. 경찰과의 충돌은 영국과 프랑스뿐이 아니다. 그리스에서 2010년 5월에 시작된 사회적 불안은 시위대와 경찰과의 충돌로 이어졌다. 스페인에서도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와 반란이 있었다. 세계 또 유럽 곳곳에서 국가정책과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의 표시가 반정부시위나 폭동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2007년 미국의 부동산위기에서 시작된 세계경제(금융)위기를 지켜보던 각국의 시민들은 무력감과 허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세계를 금융 및 경제위기로 몰아넣은 장본인들은 그에 대한 책임은커녕 국가로부터 오히려 어마어마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유럽연합위원회에 따르면, 2008년 10월부터 2010년 3월까지 은행들이 국가에서 받은 구조자금만도 4조 유로, 즉 6500조원이 넘는다.

구제금융책이란 명목으로 엄청난 자본이 은행과 금융기관에 투입된 반면, 일반시민들에겐 긴축재정으로 인한 복지혜택의 축소, 정리해고, 실업률 증가, 대학등록금 대폭인상, 세금 및 물가인상 등 고통분담만을 대가로 떠안았다. 하지만 이런 긴축재정 속에서도 정치인들과 기득권층의 비도덕적 행위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국가의 구제책으로 공적자금을 받은 기업들의 임직원들은 보너스까지 챙겼다. 정치인들은 경비를 조작해 세금을 축냈다. 올림픽유치도 세계 언론을 장식하는 영국의 호화스런 ‘로얄웨딩(Royal Wedding)'도 소외계층에겐 더 이상 현실도피처나 위로가 될 수는 없다.

분노한 청소년들과 빈곤층 시민들이 택할 수 있는 표현방법은 그래서 결국 폭력뿐이다. 청소년들이 기자들에게 한 말처럼, ‘당신들(언론)은 이렇게나 해야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다’. 언론엔 더 이상 사회적 공적책임도 기대할 수가 없다. 루퍼트 머독의 사건처럼 언론기업들은 권력, 돈, 경찰과 결탁하고 있으니,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보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언론은 소외계층을 더욱 소외시켜 왔고, 황색저널리즘으로 시민들을 탈정치화시켜 왔다.

재미있게도 소셜 미디어가 폭력을 확산시킨 주범으로 지목되어 소셜 네트워크를 막아야 한다는 소리까지 있다. 중동에선 소셜 미디어인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이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냈다고 찬양하더니 이번엔 사태를 악화시킨 요인으로 블랙베리와 트위터 등을 언급하고, 차단하려고 한다. 정작 폭동의 근본원인인 사회의 불평등 구조와 기득권층의 기만은 뒤로하고 엉뚱한 곳에서 반란의 원인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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