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한일전 패배의 후유증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적으로 한-일 관계가 민감해진 상황에서 시원스런 승리를 기대했던 축구팬들은 0-3이라는 굴욕적인 점수로 완패를 당하자 비난과 성토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근거도 없는 ‘인맥 축구론’이 또다시 불거져 나왔고, 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에 대한 ‘사퇴 여론’까지 형성됐습니다. 언제나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을 때마다 나타나던 여론몰이가 또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한일전 패배는 굴욕적이었습니다. 기술, 조직력 뿐 아니라 정신력에서도 한국은 일본에 완패했습니다. 골을 연달아 먹는 상황에도 선수들은 의지가 없었고, ‘뻥 축구’를 남발했습니다. 역대 한일전 가운데 가장 의욕 없는 경기를 한 것 같다는 선배 축구인들의 질타도 있었습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한일전 역사상 가장 창피한 경기였습니다. 충분히 화가 났고, 실망감이 컸습니다.

▲ 일본대표팀과의 경기를 치르고 귀국한 축구 국가대표팀의 조광래 감독 ⓒ연합뉴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좀 더 냉철해질 필요가 있음에도 많은 팬들은 온갖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동원하며 조광래호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한일전 시작 몇 시간 전만 해도 조광래호 축구에 기대를 걸었던 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180도 돌아서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렸지만 결과가 이 모양이라면서 조광래 감독의 자진 사퇴를 촉구하는 ‘네티즌 청원’도 올라왔습니다. 또 조광래 감독을 조금이라도 두둔하는 기사나 반응이 올라오면 “조광래 감독 친인척 아니냐”, “축구협회의 사주를 받았다”라는 글도 보이고 있습니다. 틈만 나면 들끓는 축구팬들의 ‘냄비 근성’이 또다시 도진 것입니다.

물론 이 같은 ‘냄비 근성’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닙니다. 당장 전임 허정무 감독 시절에도 이 같은 반응은 허정무호를 뒤흔들기도 했습니다. 2008년, 남아공월드컵 최종예선 북한과의 1차전에서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끝에 0-0으로 비겼을 때, 그리고 월드컵 본선 4개월 전인 지난해 2월 동아시아컵에서 중국에 0-3 참패를 당했을 때 팬들의 비난은 대단했습니다. 틈만 나면 ‘허무 축구’라며 감독의 무능을 꼬집었으며, 중국전에 졌을 때는 ‘지금이라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뤘던 거스 히딩크 감독 시절에는 말도 못할 만큼 엄청난 비난이 줄을 이었습니다. 프랑스, 체코에 대패할 때마다 ‘오대영 감독’이라는 조롱이 끊이지 않았고, 월드컵 본선 개막 4-5개월 전 열린 북중미 골드컵, 남미 원정에서 연달아 졌을 때는 “희망이 없다. 지금이라도 바꾸라”는 여론이 들끓은 바 있습니다. 움베르투 쿠엘류, 조 본프레레, 핌 베어벡 등 이후 외국인 감독들은 여론의 질타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중도 하차했습니다. 팀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온갖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음에도 예기치 않은 패배를 할 때마다 축구팬들은 들끓었고, 이 같은 행태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1년 8월, 한일전을 통해 조광래호가 또다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실한 비판과 보다 멀리 내다보는 자세, 그리고 현 조광래호에 대한 격려입니다. 비판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전술적인 문제라든가 해이해진 정신력, 선수들의 움직임 등 한일전에서 조광래호가 꼬집혀야 할 소재는 한둘이 아닙니다. 문제는 감정이 들어가 “이 선수는 안 된다”, “감독이 무능하다”는 식의 무자비한 비난입니다. 무작정 안 된다고 하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미래 지향적인 의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은 상해도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 간 조광래호에 힘을 실어줄 만한 반응과 의견 제시가 오히려 더 필요합니다.

일부에서는 외국인 감독으로 바꿔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을 선임해 1년 만에 아시안컵 우승과 한일전 완승이라는 성과를 낸 일본을 배우자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자케로니 감독 부임 전부터 지향해온 기술 축구가 서서히 뿌리를 내린 반면 한국은 이제야 그 스타일을 바꾸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또 새 감독 선임을 위한 행정적 절차, 조건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따졌을 때 외국인 감독을 데려오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미 쿠엘류, 본프레레, 아드보카트, 베어벡 등 외국인 감독들의 평균 재임 기간이 1-2년 안팎에 불과했던 점, 그만큼 한국 축구 뿐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외국인 감독 선임 주장을 너무 쉽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조광래호가 출범 1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이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세르비아,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화끈한 기술 축구’로 2연승을 달렸을 때의 반응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이렇게 들끓는 여론을 알고 있었던지 조광래 감독은 지난 11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해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며 팬들에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냉정한 여론 반응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조광래 감독 그리고 선수들이 이번 패배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더 잘 하겠다고 하는 팀에 근거 없는 것까지 갖다 붙여 뭇매를 가하는 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한 번 실수는 했습니다. 그래도 다시 기술적인 면을 강조하는 축구로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변화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과거 히딩크, 허정무 감독이 위기 상황에서 곧바로 분위기를 반전시켜 결국 목표를 이룬 것처럼 말입니다. 여론을 다시 돌리는 데에는 조광래호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변화를 추구하는 조광래호에 조롱을 일삼는 것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국가대표에 온갖 비난을 퍼붓는 것은 세계적으로 ‘응원 1등 국가’로 알려진 한국 축구팬의 명성에도 먹칠을 하는 행위입니다. 비판도 하고 아쉬움을 표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선을 과도하게 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 일본에 화끈한 축구로 이길 때까지, 스페인, 브라질 같은 강호와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때까지 조광래호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다시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번 기회에 여론도 좀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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