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월화드라마 스파이 명월에 출연 중인 한예슬이 결국 촬영 펑크를 냈다. 얼마 전 주 5일 촬영을 요구해 빈축을 샀던 터라 방송 결방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 이번 펑크로 인해 한예슬은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렇게 파국으로 달리게 된 원인은 결코 한예슬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회당 몇천 대의 출연료를 받는 주연 여배우가 제작현장을 이탈하는 것은 시청자에 대한 배신행위나 다름없다. 거기다가 파트너 에릭 또한 사려 깊지 못한 태도로 논란이 되고 있어 스파이 명월은 최악의 위기상황에 놓이게 됐다.

한예슬은 15일 촬영도 거부할 것이어서 결국 15,16일 방송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예슬은 더욱 욕을 먹게 될 것이며, 소위 ‘태도’에 대해 엄격한 한국 정서상 한예슬이 연예계에서 온전히 버틸 수 있을까도 걱정되는 대목이다. 이런 한예슬의 과격한 태도의 배경에는 황인혁pd와의 심각한 불화설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유가 어디에 있건 일단 판을 엎은 잘못이 한예슬에게 있기 때문에 독박을 쓰고 말 처지가 됐다.

드라마는 배우와 감독 둘의 것이 아니라 그 드라마를 기다렸다 즐겁게 보는 (그것이 혹시 성에 차지 않는 시청률이라 할지라도) 시청자의 것이다. 둘이 싸우느라 촬영을 못해 결방하겠다고 하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는 말이다. 지금 상황은 한예슬의 열렬한 팬이라도 차마 변호에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다. 연기력 등 배우의 기본적인 기능을 떠나 스파이 명월은 남녀 주인공 캐스팅에 완벽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스파이 명월 사태를 보면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14일, 15일 촬영이 안 되면 15일, 16일 방송이 안 된다는 코멘트다. 18회 중 11회면 중반에 해당한다. 11회부터 이러면 막판에 가서는 펑크가 나지 않더라도 결방의 위험이 있다. 스파이 명월은 진작부터 생방송 드라마 체제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스파이 명월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제작 행태가 마치 당연한 듯이 여기고 있는 것이 정말 심각한 문제다.

최근 드라마 촬영 중인 배우들의 사고 소식인 연달아 전해졌다. 다행히도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원인은 빡빡한 촬영일정에 맞추느라 생겼던 것들이다. 다행이기는 하지만 드라마 제작 환경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인명을 빼앗는 사고가 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그때 가서는 후회하고, 비판해도 이미 늦은 일이 될 것이다.

촬영 펑크를 낸 한예슬에 대해서 벌써부터 연예계 퇴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래도 상관없지만 그 이전에 먼저 손봐야 할 것이 바로 이 쪽대본에 의해 생방송처럼 찍어대는 드라마 제작 시스템이다. 생방송 드라마를 찍어대는 한 배우들은 항상 사고위험에 떨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대본을 충분히 분석하고 연기를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카메라 앞에 서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연기를 천부적으로 잘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드라마 주인공에는 그렇지 못한 스타들도 캐스팅되고 있다.

생방송 드라마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은 사전 제작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어 제작사들이 극히 꺼리고 있다. 시청자 반응을 봐가면서 드라마 방향을 바꾸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기 때문에 사전제작은 위험한 도전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는 위험하지만 꼭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전체가 무리라면 적어도 반 이상은 미리 제작을 끝내놓는 절충안도 가능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대본만이라도 완성된 상태에서 드라마를 찍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루나 이틀 배우가 촬영에 임하지 못한다 해서 곧바로 결방으로 이어지는 것 자체가 대단히 위험한 모험이다. 배우와 감독의 호흡이 잘 맞는다면 별 문제 없이 드라마 한 편이 끝날 수 있겠지만 이번처럼 불화가 생긴다면 결방이라는 씻을 수 없는 방송사고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15일은 광복절이다. 노동조건이 가장 열악하다는 택시기사들도 쉬는 날이다. 이런 날까지도 촬영을 해야 방송이 가능한 시스템이 한예슬의 촬영거부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한예슬처럼 주연배우가 촬영을 거부하는 일은 다시는 생겨서는 안 되겠지만 이런 불상사가 아니더라도 배우들 신상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매우 높다. 촬영 중 부상을 입거나, 과로로 쓰러지는 일이 생긴다면 불가피하게 촬영을 미룰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배우들은 그런 일이 생겨도 죽을힘을 다해 촬영장에 나온다. 멋진 투혼이고, 본받을 만한 프로정신이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위험을 안은 채 드라마가 만들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