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는 스릴러 장르에 있어 아주 매력적인 소재입니다. 관객의 감정이입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연출이 뒷받침된다면, 서슬 퍼런 긴장감을 형성하는 데 이만큼 적합한 조건도 드물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시각장애를 안고 있는 캐릭터를 십분 살려야만 합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이 캐릭터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세밀하게 묘사하는지도 극의 성패를 좌지우지하는 관건입니다. 비단 시각장애뿐만 아니라 좋은 소재를 도입하고서도 무용지물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블라인드>는 제법 성공적인 스릴러입니다.

<블라인드>는 장르의 틀 내에서 나름 신선한 시도를 종종 보여주며 촘촘하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물론 그 일차적인 공은 기초부터 탄탄하게 쌓아나간 시나리오에 있습니다. <블라인드>의 도입부를 살짝 한번 볼까요? 시각장애인 수아는 택시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목격하게 됩니다. 이 사고란 건 다름 아닌 수아가 탄 택시가 무언가를 들이받은 것이었습니다. 수아는 본능적으로 사람을 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경찰에 신고합니다. 하지만 목격자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경찰에선 콧방귀만 뀝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서만 꾸밀 요량으로 한 형사가 수아와 마주하게 되는데, 심드렁하게 굴던 그가 어느 순간에 수아를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두 사람은 파트너를 이뤄 수사에 뛰어듭니다.

과연 수아는 어떻게 해서 형사의 관심을 끌게 됐을까요? 우선 <블라인드>는 프롤로그에서 시력을 잃게 되는 수아를 보여준 후에 3년의 시간차를 두고서 도입부로 들어갑니다. 이만한 시간(時間)의 흐름이면 시각(示覺) 외의 감각 - 당연히 청각이겠죠? - 에 꽤 익숙해지고 예민해졌을 법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수아는 시각을 잃기 전에 경찰학도였습니다. 후자는 다소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블라인드>는 설득력 있는 전개를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설정을 미리부터 잘 다져놓은 셈입니다. 이 두 가지 덕택에 형사는 수아의 의견을 쉽사리 묵살하지 못하고 협력하게 됩니다.

<블라인드>의 시나리오는 캐릭터 설정도 허투루 다루지 않습니다. 수아와 형사는 수사 초기에 또 다른 목격자인 기섭과 만납니다. 그러면서 수아와 기섭이 각기 다른 진술을 하면서 수사에 차질을 빚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사람의 진술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사건은 해결 국면에 접어듭니다. 이건 뭐 장르의 공식이나 다름없는 과정이니 색다를 건 없습니다. 다만 왜 그런 의견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었느냐를 따져볼 때, 캐릭터의 성격을 초반에 잘 그려주어 충분한 설명이 된다는 것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블라인드>는 디테일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각 캐릭터를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낭비하지 않는 것도 맘에 듭니다. 수아, 기섭, 형사 그리고 범인에 이어 심지어 안내견까지 극 중에서 제 몫을 충분히 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무능한 경찰이 도처에 산재하고 있다는 점은 유감입니다. 왜 항상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에 나오는 경찰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것 또한 공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번 동일한데, 진부할 대로 진부한 장치죠.

시나리오에 이어 시각장애자가 겪는 상황을 묘사하는 연출도 준수한 편입니다. <줄리아의 눈>이 그랬던 것처럼 <블라인드>도 관객과 수아를 일체화시킬 수 있도록 참신한 시도를 종종 합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주인공의 신체적 한계와 특이하게 발달한 능력을 동시에 적절히 활용하면서 스릴을 유지하는 것은 이쪽 장르의 성패와 직결됩니다. <블라인드>는 시나리오와 연출의 조합이 이것을 훌륭하게 이끌어가는 데 비교적 성공했습니다. <7광구>가 새로운 시도에 그쳤던 것에 반해 <블라인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갖춘 영화로 탄생했습니다.

이와 같은 <블라인드>의 성공에는 시나리오의 공이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의 다른 영화에서는 보지 못했던 상황까지 넣어서 긴장감을 높이는 데 일조한 것도 결국 시나리오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지하도에 있는 노란 블록의 용도가 실제로도 그런 건지 궁금해졌습니다) 범인과 수아의 입장을 역전시킬 수 있었던 결말부의 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던 연출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잘만 했으면 관객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할 수 있었을 겁니다.

반대로 시나리오의 흠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스릴러를 표방하고 나섰다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여 마무리하는 것이 미덕입니다. 그러지 않고 더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섣부른 욕심으로 전락할 수 있는데, <블라인드>가 바로 그런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마치 한국 코미디 영화처럼 말입니다. 수아에게 죄책감을 부여하여 일종의 성장기적 드라마를 심으려고 한 것은 명백한 과욕입니다. 또한 희생자들의 공통점을 그렇게 설정한 것도 거슬렸습니다. 이것만 보면 <블라인드>는 남성중심적 사회에 갇힌 시각을 갖고 여성을 다룬 편협한 영화라고 평(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


덧 1) 배우들의 연기는 다 좋았지만 특히 범인 역할의 양영조는 정말 살벌한 연기를 보여주더군요. 분명 눈에 익은 배우라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OCN 무비 <이브의 유혹>에서 '키스'편에 출연했던 분이네요. 역시 싸이코 역할.

덧 2) 안내견을 연기한 개가 <마음이>의 달이인 것을 방금 알았습니다. 이 개는 연기력이 사람 뺨을 후려치고도 남네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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