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 마라톤은 다시 떠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만년 기대주'로 불렸던 지영준(코오롱)이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이봉주 이후 8년 만에 다시 남자 마라톤 정상 자리를 탈환했기 때문입니다. 오일 달러로 아프리카 선수들을 사들인 중동 선수, 한창 떠오르고 있는 일본 선수들을 따돌리고 거둔 쾌거였기에 그 의미는 대단했습니다. 침체의 늪에 빠졌던 한국 마라톤의 부활을 꿈꾸는 계기도 만들어 졌습니다.

하지만 연이은 부상, 그리고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지영준은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허벅지 부상으로 결국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에 나서지 못하는 아픔을 맛봐야 했습니다. 이번 대회를 통해 홈팬들 앞에서 멋지게 더 떠오르는 계기를 만들려 했던 한국 마라톤의 도전에도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상황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대회를 코앞에 두고 많이 흔들릴 만한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올 한해, 지영준의 컨디션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이후 이상하게도 대회 출전을 앞두고서 잇따라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해 완주를 하지 못했습니다. 대구 세계대회를 앞두고 철저한 관리에 의해 몸을 만들어가야 했고, 그런 맥락에서 실전 훈련이 꽤 필요했던 상황이었는데 지영준은 이를 잘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홈에서 열리는 대회인 만큼 자존심을 걸고 열심히 준비했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러나 한창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터진 '금지약물 복용설'이 발목을 잡으면서 지영준을 비롯한 마라톤 국가대표 선수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정만화 남자 마라톤 대표팀 감독이 선수들에게 금지 약물 성분이 들어간 조혈제를 투여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경찰이 몇 달간 수사를 벌인 것입니다. 투여한 조혈제가 금지 약물이 아니었던 데다 이렇다 할 범죄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해 무혐의로 수사가 종결되고 누명을 벗었지만 근거 없는 낭설 때문에 불거진 약물복용설 사태는 훈련에 큰 지장을 받을 정도로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했습니다. 훈련을 잘 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심리적으로 마음을 다 잡으며 하루하루를 준비해야 했던 선수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지영준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성적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몸은 또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지영준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번 대회를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그나마 희망을 걸었던 지영준의 낙마로 한국 마라톤은 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개인 뿐 아니라 팀 단체전까지 치르는 세계선수권 마라톤의 특성상 '에이스'로 꼽힌 지영준의 탈락은 분명히 선수들 분위기를 더 어수선하게 할 수 있습니다. 4대 마라톤 대회, 올림픽보다 워낙 변수가 많아 기록보다는 순위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만큼 지영준에 대한 기대가 컸던 한국 입장에서는 분위기를 추스르는 게 급선무인 상황입니다.

▲ 지영준의 공백을 메울 것으로 기대되는 두 선수, 정진혁과 이명승
그렇기는 해도 이 기회를 살려 한국 마라톤이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계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 기회에 홈팬들의 성원을 등에 업고 제대로 된 기대주를 발굴해 키우는 계기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선수들에게도 오히려 에이스가 없는 것에 자극제가 돼 더욱 마음을 잡고 똘똘 뭉치는 분위기를 만들어 더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는 데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이번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남자 마라톤 선수는 모두 5명, 정진혁(개인최고기록 2시간09분28초)과 김민(2시간13분11초), 황준현(2시간10분43초), 이명승(2시간13분25초), 황준석(2시간16분22초)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정진혁은 풀코스 마라톤에 입문한 지 2년 만인 지난 3월, 2011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9분 28초의 기록으로 전체 2위를 차지해 새로운 기대주로 꼽히고 있습니다. 워낙 발전 속도가 뛰어나 마라톤계 내에서 상당한 기대를 받고 있는 정진혁이 제 몫을 다 해준다면 의외의 성과가 기대됩니다. 또 2시간10분대 개인 최고 기록을 갖고 있는 황준현과 지난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18위에 올랐던 '베테랑' 이명승도 10위권 진입이 가능한 선수들입니다. 이 선수들을 주축으로 개인 종목에서 '10-10(10개 종목에 10위권 진입 목표)'을 꿈꾸는 한국 육상에서 마라톤이 제 몫을 다 해준다면 분위기는 한층 달아오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첫날 첫 경기로 치러지는 경기이기에 그만큼 마라톤이 해야 하는 역할은 큽니다.

악재도 덮치고, 부담감도 높습니다. 하지만 예전부터 잠재력을 갖춰왔던 한국 마라톤이 홈팬들 앞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준다면 부흥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올림픽, 아시안게임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고도 세계선수권과는 유독 이렇다 할 인연이 없던 한국 마라톤이 이번 대구 세계육상선수권에서 과거를 훌훌 털고 멋지게 재기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그런 한국 마라톤의 도전을 응원하는 자세도 이제는 필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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