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는 지금 세대교체기입니다. 길게 브라질월드컵 본선을 내다보고 기존과는 다른 스타일의 축구로 세계의 벽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최악의 패배를 맛봐야 했습니다. '영원한 라이벌'로 불렸던 일본과의 경기에서 한국 축구 특유의 색깔을 보여주지 못하며 0-3으로 굴욕적인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 일본이 자유자재로 원활하게 경기를 풀어나가는 사이에 한국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며 한 골도 넣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 카타르 도하 알 가라파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시안컵 C조 최종전 한국 대 인도 경기에서 박지성이 교체되며 이영표에게 주장완장을 넘기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런 위기 상황을 잘 헤쳐 가게끔 컨트롤할만한 '베테랑 선수'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세대교체기에 어느 팀이든 겪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한동안 무패 행진을 달리며 잘 나가고 있다는 국가대표팀에서 이런 모습이 나타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두 맏형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바로 지난 1월 아시안컵 이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박지성과 이영표입니다.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 유럽 무대 경험을 통한 향상된 개인기량이 돋보였지만 무엇보다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모든 선수들에게 귀감이 됐던 박지성, 이영표 두 선수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대단했습니다. 동료 선수들을 아우르는 능력, 때로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자처했던 두 베테랑 덕에 어떤 순간에서도 한국 축구는 좋은 분위기를 이어갔고, 다양한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남아공월드컵에서도, 그리고 이들이 마지막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던 1월 카타르 아시안컵에서도 이들을 보고 많은 후배들은 힘을 얻었고 온갖 위기 상황에서도 투혼을 발휘하며 수많은 명장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들은 지난해 5월에 열린 한일전에서도 발군의 기량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팀의 2-0 완승을 이끄는 데 역할을 다했습니다. 일본대표팀의 월드컵 출정식을 겸해 치른 경기였던 만큼 일본 서포터 울트라스(울트라 닛폰)의 함성 소리는 대단했지만 경기 시작 5분 만에 터진 박지성의 골 한 방에 순간 조용해졌고, 빤히 쳐다보는 세레머니에 또 한 번 굴욕을 맛보며 침묵에 빠졌습니다. 수비에서는 이영표가 동료 수비진을 완벽하게 컨트롤하며 일본 공격진을 완전하게 무력화시키고 이렇다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2월 3-1 승리 이후 3개월 만에 일본에 굴욕적인 패배를 안긴 데에는 박지성, 이영표 두 선수의 안정적이면서도 돋보이는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없이 치른 첫 한일전에서 한국 축구는 너무 무기력했습니다. 박지성의 바통을 이어 '새로운 캡틴박'으로 활약하고 있는 박주영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소속팀 결정 문제로 심리적으로나, 또 체력적으로나 한계를 드러낸 탓에 박주영은 탄탄한 조직력을 갖춘 일본의 수비벽에 연신 막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제몫을 다 해야 하는 주장이 제대로 플레이하지 못하고 컨트롤하지 못하다보니 선수들은 전체적으로 우왕좌왕했고,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후반 중반이 되기도 전에 3골을 더 내주는 굴욕을 맛봤습니다. 박주영 역시 결국 이 분위기에 휩쓸려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후반에 교체 아웃되며 나름대로 건재를 과시하려 했던 목표 달성에도 실패했습니다.

▲ 삿포로돔에서 열린 한ㆍ일 국가대표축구팀 친선경기에서 조광래 감독이 후반 교체된 박주영을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주영 외에도 베테랑급 선수들의 리더십은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김정우, 차두리, 이정수 등 A매치 경험이 많은 선수들이 중심을 이뤄 다른 젊은 선수들을 통솔해야 했지만 워낙 점수차가 크게 벌어진 탓에 제 역할을 소화하기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중원 장악'이라는 명확한 경기 해법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컨트롤할만한 리더십을 갖춘 선수를 보기 어렵다보니 후반 중반 이후에는 이 선수들조차 마음이 급급해 어이없는 플레이가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경기를 풀어갈 리더십의 부재는 결과적으로 이번 경기에서 조광래호가 해결해야 하는 최고의 과제로 남는 씁쓸함만 안겼습니다.

기량이 좋다고 해서 베테랑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울 때 동료, 후배 선수들을 이끌면서 분위기를 바꾸고 먼저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갖춰야 박지성, 이영표처럼 진정한 존경심을 얻고 진짜 베테랑 국가대표가 될 수 있습니다. 경기력 저하도 안타까웠지만 적어도 선배 선수들까지 이렇다 할 강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새로운 팀을 만들어가는 조광래호라지만 새롭게 키우는 젊은 선수들 못지않게 확실한 리더십을 갖춘 선배 선수들도 함께 키워야 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 다음달 2일, 월드컵 3차예선을 치르는 마당에 일단은 먼저 '캡틴박' 박주영부터 소속팀을 확실하게 결정짓고 개인적인 안정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또 박주영 뿐 아니라 경험 있는 선수들이 동료, 후배 선수들을 잘 이끌어갈 수 있게 달라진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높아지는 존재감 자체에 팀도 더욱 결속력이 생기고, 그만큼 더 좋은 팀을 만드는 계기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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