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는 재미있다. 그런 만큼 잘 팔린다. 그러나 드라마는 재미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한국 드라마는 아주 높은 생산성에 비해 소재와 형식은 대단히 단조롭기만 하다. 현대물은 재벌2세 남자와 신데렐라가 되는 여자에서 아주 조금씩만 바뀔 뿐이다. 제목과 배우가 달라져서 그렇지 그대로 이어본다고 해도 모든 드라마가 아주 통하지 않을 것도 없다. 한류라는 말을 만들어낸 드라마 제국의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내용적으로 초라하다.

한국 드라마의 내용에 실망한 사람들은 전과 달리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미드나 일드를 기웃거리기 마련이다. 최근 일본 드라마 중에 눈을 번쩍 뜨게 할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그래도 살아간다>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드라마는 대단히 무거운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 소년 범죄에 의해 파괴된 양쪽 가족의 고통과 그 화해의 과정을 대단히 조심스럽고도 자연스럽게 접근해가고 있다.

참여한 수가 적어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전원 10점 만점의 평점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가 아니라 한국 시청자가 준 평점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과연 한국에서 이런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절망에 가까운 의문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드라마에 감탄하는 마음 한편에서는 한국 드라마에 대한 원망도 생기곤 한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에 희망이 될 작은 시도가 시작됐다.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전에 TV문학관이나 베스트 극장 등 단막극을 통해 작품성 있는 드라마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다 사라졌다가 이번에 다시 드라마 스페셜로 부활해 이번 주로 10회째를 맞고 있다. 그 10회째의 드라마 주제가 독특하다. 바로 동성애 그것도 여성의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그린 첫 번째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이 드라마를 기다리면서 작품성에 대한 진지한 기대감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성애자 본인이 아닌 이상 이성애자에게 이런 주제는 호기심이 동기의 전부이기 십상이다. 그런 가벼운 치기는 배우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조용히 내려놓게 된다.

여성 동성애자들의 이야기 <빌리티스의 딸들>은 한 여고생의 독립영화 제작 장면으로 시작된다. 짐승돌이나 남자 톱스타에 빠져있을 법한 여고 2년생 주연(진세연)이는 다른 반 최나리를 좋아한다. 물론 좋아한다고 쉽게 다가설 수는 없다. 그렇게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다가 ‘같은 편끼리는 척 보면 알아본다’는 윤여경(안지현)과 만난다. 소극적인 주연과 달리 여경이는 좀 더 용감하다.

최나리를 몰래 찍은 사진이 잔뜩 담겨진 휴대폰을 화장실에 놓고 와 다른 학생들이 동성애자의 것이라고 난리를 피울 때 여경이는 말없이 다가가서 휴대폰을 찾아와 주연이 락커에 몰래 넣어둔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여경이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고 결국 전학을 가게 된다.

친구의 비밀을 감춰 주기 위해 여경이가 희생되고, 주연이는 동성 애인과 함께 사는 강한나(한고은)을 만나 고민을 털어놓다가 여성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빌리티스의 딸들이라는 클럽을 알게 된다. 거기서 화자는 주연이에서 강한나(한고은)로 바통이 넘겨진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 주인공은 클럽 주인 박명희(최란)과 최향자(김혜옥)에게로 넘어가 대단원을 이루게 된다. 형식은 하나의 드라마지만 자세히 보면 여성 동성애자 3팀 다시 말해 세대별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꾸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결론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에 3세대의 동성애 커플이 오랜만에 모여 조촐한 파티를 열고는 있지만 동성애의 삶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단정 짓지도 않는다. <빌리티스의 딸들>을 만든 작가와 PD는 최대한 드라마에 개입하지 않고 가능한 관찰자의 자세를 지키려고 애쓴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여성 동성애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만은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배우들의 침착한 연기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단정한 연기로 빌리티스의 딸들은 좀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빌리티스의 딸들>은 예민한 주제를 다룬 드라마치고는 담백한 터치가 우선 마음에 든다. 그런 군더더기 없는 내레이션을 통해 작가는 이 길이 결코 쉽지만은 않지만 그 결말을 만드는 것은 이성애자들의 연애도 그렇듯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이해라는 당연한 말을 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19금 드라마치고는 다소 심심한 면도 없지 않지만 자칫 이 드라마의 화두를 엉뚱하게 곡해할 사람들 때문에라도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드라마가 끝나고 접한 한 기사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시청자 일부가 이 드라마가 동성애를 권장한다며 중단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우선 중단을 요구했다는 시청자는 이 드라마가 단막극인 정도는 알고 흥분을 했어야 했다. 그리고 동성애가 무슨 전염병처럼 옮기라도 하는 듯한 무식함도 좀 지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60분짜리 드라마 한 편으로 스타 패션 따라하듯이 동성애자가 늘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도 철회해야 할 것이다. 동성애가 분명 소수의 성취향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죄도 아니고 병은 더욱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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