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8년 7월 4일 필리핀 수빅조선소에서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가운데)이 아로요 대통령으로부터 필리핀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필리핀 대통령훈장이 제정된 것은 1993년. 지난 16년간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12명에 불과하며 아시아인으로서는 조 회장이 처음이다.ⓒ 연합뉴스
안녕하십니까? 환갑을 넘은 나이에 50일 넘게 낯선 땅에 머무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아무리 외국이라도 호텔에 인터넷이 안 될 리는 없겠죠? 해서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아... 제 소개를 하는 게 순서겠군요. 회장께는 ‘듣보잡’이겠습니다만 저는 참여정부에서 대통령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냈고 지금은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라는 진보진영 씽크탱크에 몸담고 있는 정태인이라고 합니다.

“진보라니..,. 뻔한 얘길 하겠구나”, 컴퓨터 스위치부터 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200일이 넘게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20일이 넘게 단식을 하고 있는 심상정, 노회찬 진보신당 고문들 얘기도, 그리고 정몽준의원처럼 국회 청문회 얘길 하려는 것도 아니고 부산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니까요. 순수하게 저는 경영 컨설팅을 하려고 합니다. 제가 조선산업을 공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산업경제학을 전공으로 삼았고 청와대에서 실물경제도 들여다 봤으니 공짜 컨설팅 치고는 혹시 건질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잘 아시다시피 한국 조선산업은 세계 최고입니다. 삼성의 반도체나 현대의 자동차, 포스코의 철강이 우리의 대표 산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설계 등 핵심 기술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는 조선산업 뿐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다른 산업과 달리 소품종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조선산업에서는 특히 노동자의 숙련과 응용 능력, 경제학에서 말하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한국 조선산업 노동자들의 생산성은 압도적이지요. 유럽의 조선산업이 나날이 쇠퇴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노동자 평균 연령이 이미 55세를 넘어섰다는 점을 꼽는 걸 보면 한국의 경쟁력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물론 아니죠. 다른 제조업과 꼭 마찬가지로 조선산업 역시 중국이 걱정입니다. 더구나 중국 선박조의 50%를 유럽이 주문하고, 유럽의 조선 업체들이 서서히 중국으로 진출하고 있는 건 조만간 우리에게 엄청난 위협이 될 겁니다. 해서 저는 한진이 필리핀 수빅에 대형 조선소를 건설한 것에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해외 생산이 중국과의 경쟁전략 중 하나라는 건 틀림없습니다. 임금이라는 요소를 생각한다면 당연하다고 까지 할 수 있죠.

그러나 다른 모든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임금이나 땅값, 금리와 같은 요소비용을 놓고 중국과 경쟁한다면 백이면 백 우리는 뒤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현재의 기술격차를 유지하거나 더 벌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요? 저는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바로 적기”라는 속담보다도 훨씬 더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 초반에 제가 실리콘밸리에서 공부할 때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품질 면에선 당시에 이미 삼성TV가 소니를 거의 다 따라 잡았지만 가격은 절반에 불과했습니다. 그 후 10년이 지나서야 그 지위가 역전됐습니다. 초반에 따라잡는 데는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을 수 있지만 마지막에 추월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요소비용을 줄이는 데만 신경을 쓴다면 조만간 중국에 추월당한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따라서 한진중공업이 살 길은 크루즈(여객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을 만드는 겁니다. 쇄빙선을 만든 자랑스러운 기억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크루즈는 컨테이너와 또 다른 차원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안락하면서도 빨라야 하니 엔진부터 실내 가구까지 화물선과는 비교가 될 수 없겠지요. 삼성이나 현대도 겁먹을 정도지요. 그러나 저는 조선업계의 유명한 전설을 떠올립니다. 그 옛날 고 정주영회장이 현대 중공업을 창업하면서 그랬다지요. “조선산업은 철판을 이용한 건설산업”이라고요. 조회장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셔야 합니다. “크루즈는 바다 위에 호화맨션을 건설하는 것”이라고요.

한국 제조업 전체로 봐서 가장 큰 문제는 기계와 화학산업이 취약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방향을 알지만 고부가가치 선박에 도전하지 못하는 거지요. 하지만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그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 기획재정부(구 재경부)는 금융허브를 만들겠다는 둥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했지만 지식경제부(구 산자부)는 확실하게 고급 선박 쪽으로 올바른 방향을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조선이 아니라 해양산업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것도 백번 옳은 얘기지요. 또 하나의 다행은 울산과 광양의 철강, 마산창원의 기계산업, 더구나 부산신항과 광양항을 끼고 있는 부산이 천혜의 해양산업 적지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기업가는 1분 1초의 여유도 없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먼 미래의 장밋빛 그림이나 그리고 있으니 역시 책상물림이라고요. 하지만 한진이 이 쪽으로 가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영도조선소 자리에 주상복합아파트를 건설한다는 풍문이 사실이라면 한진중공업은 망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부산은 고급 아파트가 넘쳐 납니다. 세계금융위기는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르고, 우리의 부동산 거품은 언젠간 터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시기에 영도에서 아파트 공사를 시작한다면 거의 100% 한진은 망합니다.

그래도 크루즈는 언감생심, 그림의 떡으로 보이실 겁니다. 현대나 삼성이 엔진과 전자제품을 도와주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더 눈을 크게 뜨면 유럽의 조선산업이 보이실 겁니다. 제가 비서관일 때 세계 최고의 기계설비 기업인 독일 티센크루프(Thyssen Krupp)의 한국 진출을 도운 적이 있습니다. 이들이 중국에 아시아 본부를 세우려다 한국으로 방향을 틀었던 건(이명박 정부 와서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중국의 부품 수준이나 기업 관행이 미덥지 못해서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티센은 군함과 크루즈를 만들고 있고 당시에도 조선산업에서 합작할 기업을 찾고 있었습니다. 티센이나 핀란드의 아커(Aker)와 기술 제휴를 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유럽 기업들은 중국에 기술만 뺐기는 게 아닌가, 두려워 하고 있고 중국 역시 아직은 컨테이너가 목표기 때문에 유럽이 고급선박에서 한국과 협력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당장은 어떻게 하느냐구요? 수빅조선사가 수주했다고 발표한 물량을 결코 소화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회장님도 잘 알고 계시겠죠. 그 중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 그리고 규모가 적은 선박을 영도에서 만들면 2-3년은 문제가 없겠죠. 지금은 R&D 능력과 숙련 노동자를 길러야 할 때이지 ‘정리해고’할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회장님은 연구직들을 대량으로 감축하셨더군요. 거꾸로 가시고 계신 겁니다.

아.. 정부도 문제라고요? 그렇습니다. 기업가 출신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대통령은 토목 프렌들리로 판명났고 지경부 장관은 이익공유제 말참견이나 하고, 주유소에나 관심이 있으니 정말 문제지요. 그러나 한진에 다행인 것은 이 정부의 수명이 이제 1년여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조회장께서 영도를 중심으로 ‘해양부산’을 내걸면 부산시와 지역사회 역시 한진을 적극적으로 도울 겁니다. 다음 그림을 한번 보시고 그 설계자가 되는 걸 꿈꿔 보시기 바랍니다. 세계 0.1%의 인구, 1%의 GDP, 그러나 10%의 해양산업을 지배하고 있는 노르웨이의 모습입니다.

▲ (Poter, 2000, The Microeconomic Foundation of Competitiveness and the Role of Cluster)

노르웨이는 부산과 경남의 인구보다도 적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부산/경남은 해양도시의 모든 면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조회장께서도 기업이 살고 노동자도 살고, 지역사회, 나아가서 한국도 사는 길을 안다면 과감하게 나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명백합니다.

이 한마디만 기억하십시오 “영도 땅위에 아파트를 지으면 망합니다. 그러나 바다 위에 지으면 밝은 미래가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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