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에서 있었던 테러와 대학살 사건 이후 사람들은 왜 노르웨이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노르웨이는 사회민주주의가 꽃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반 이슬람 정서와 극우화가 노르웨이까지 확산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극우파들의 테러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남에 따라 유럽연합은 대책마련에 고심하지만, 그것도 일시적인 현상일 뿐 근본적인 해결엔 미온적인 분위기다.

언론들은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든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의 관심을 보이고, 여론은 언론을 따라 잠잠해진다. 그 엄청난 충격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린다. 세계 여론을 주도하는 미국과 유럽의 언론은 물론 서구 언론의 영향을 받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언론들도 마찬가지다. 안타깝게도 이런 사건이 발생 할 때마다 외국인 혐오에 대한 경각심과 신나치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지만, 일주일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각증세를 보인다.

차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면 마치 새삼스럽다는 듯 보도한다. 언론은 이런 반복적인 보도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치는 대처방안에 구체적이지 못하니 유럽의 극우화는 갈수록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유럽의 이슬람 증오 분위기는 과거 유대인 증오가 독일 나치즘의 상징이 되어버린 때와 유사한 점들이 많다. 과거의 유대인 증오가 이슬람 증오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또 이슬람이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유대인 혐오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또 다른 인종에 대한 혐오가 사라진 것도 결코 아니다.

유대인 학살하면 일반적으로 나치독일을 연상한다. 유대인 학살을 극도의 경제난속에서 독일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로 이루어진 나치독일의 행위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 학살을 독일에만 또 독일의 나치시대만으로 국한하는 것은 단순한 해석이다. 독일인들이 갑자기 미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히틀러의 인종주의적 광기가 페스트처럼 전염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오래 전부터 뿌리내린 유대인 혐오를 바탕으로 한다. 독일 나치가 유대인을 유럽에서 몰아내기 시작했음에도 유럽의 주변 국가들은 초기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 다니엘 골드하겐(Daniel J. Goldhagen)의 책 “히틀러에 기꺼이 동조한 집행자들 (Hitler’s Willing Executioners, 1996)”의 독일어판. 골드하겐은 당시 독일에서도 많은 화제와 함께 정치토론에도 초대됐다. 표지사진에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Die Juden sind unser Unglück)'이란 문구가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 독일의 전쟁은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나치독일이 주변국들을 공격하지 않고 단지 유대인들만 유럽에서 몰아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히틀러가 패전을 앞두고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대량학살 할 계획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을 구하기보다 독일의 화학공장들과 도시들을 폭파하는데 더 열을 올렸다. 결국 엄청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 단체는 미국을 상대로 그에 대한 책임을 묻고 소송까지 했다. 숨겨진 이야기다.

미국의 유대인 학자인 다니엘 골드하겐(Daniel J. Goldhagen)은 그의 책 “히틀러에 기꺼이 동조한 집행자들 (Hitler’s Willing Executioners, 1996)”에서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배척, 즉 안티세미티즘(Antisemitism)은 중세시대에 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쓰고 있다. 그는 유대인 학살을 독일나치시대로만 국한해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분석이라고 주장한다. 또 경제위기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를 간과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독일나치시대 이전에도 유대인 증오가 존재해 왔고, 각 시대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유대인 박해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가하면, 어느 땐 억제된 것일 뿐 유대인 혐오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현존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유대인배척과 박해의 오랜 역사는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왜 유대인 대학살이 독일에서 발생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석들이 유대인 대학살을 단지 나치시대에만 국한해 해석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로인해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골드하겐에 따르면, 십자군전쟁과 함께 시작된 유대인에 대한 탄압과 배척은 종교적인 것으로 기독교사회인 유럽에선 유대인을 악마와 거의 동일시 해 왔다.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혐오와 증오의 근원은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인 메시아에 대한 거부와 더 나아가 예수의 사망을 유대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실한 기독교인들에겐 이것이 유대인들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정당한 이유’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중세시대 기독교인들에게 유대인 증오는 오히려 당연시 여겨졌고, 극단적인 유대인 탄압의 역사는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 독트린과 함께 구체적으로 표면화 된다. 예로 들면, 1096년 첫 십자군 전쟁, 1290년 영국의 유대인 추방, 스페인의 이단자 처단과 1492년 유대인 추방, 1497년 포르투갈에서의 유대인 추방, 여러 번의 유대인 학살, 1894년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20세기 나치독일(1933-1945)의 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진다.

영국에서 1290년 유대인 추방이 시작된 이후 1656년까지 거의 400년에 걸쳐 영국 땅엔 유대인이 살지 않았음에도 영국의 민족문화에 여전히 유대인 증오와 편견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와 유대인 증오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고 골드하겐은 설명한다.

▲ 베니스에 있었던 유대인 게토의 모습. 사진출처: Giovanni Dall'Orto/Wikimedia

일반인들은 윌리엄 섹스피어를 세계적인 희극작가로 칭송하지만, 섹스피어는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세계적으로 알리는데 상당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는 1596년의 작품인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에서 유대인 샤일록에 대해 ‘악독한 고리대금업자’로 묘사한다. 이것이 피도 눈물도 없는 돈 욕심밖에 없는 유대인을 상징하는 일반적인 통념이 되어버렸다. 유대인에 대한 섹스피어와 그 당시의 편견이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

섹스피어가 작품의 무대를 베니스로 정한 이유는 우연이 아니다. 베니스는 당시 상업도시로 유명하지만 또한 세계 최초 유대인 게토(Ghetto)의 발생지다. 베니스에선 13세기부터 유대인들의 정착이 허용되었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유대인을 탄압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표시로 노란휘장을 달고 다녀야했고, 땅의 소유와 유대교회당의 건축이 금지됐다. 또 유대인은 기독교 예배와 세례를 받도록 강요되기까지 했다. 1553년엔 탈무드(Talmud: 유대교 율법)를 태우는 사건도 있었다. 유대인들에겐 직업 또한 제한되어 전당포와 고리대금업이 유대인들에게 허가된 직업들이다. 다른 한편으론 유대인들의 경제적 영향력을 막기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시키고,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와 상인들은 도시의 중심부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격리시켰다.

1516년 베니스에선 700명의 유대인들이 포탄을 제작했던 작고 더러운 섬으로 추방됐고, 유대인들은 낯에만 섬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밤에는 기독교인 보초병들이 출입구를 통제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최소의 게토(Ghetto)의 시작이며, ‘게토’라는 용어도 여기서 유래한다. 베니스는 세계의 관광객이 몰리는 아름다운 도시라는 유명세와 함께 이런 어두운 역사를 안고 있다.

▲ 나치독일에서 유대인 증표로 달고 다녔던 노란색 휘장. 베니스에서 유대인의 달았던 것과 같은 노란색이다. 사진출처: Daniel Ullrich, Threedots/Wikimedia
이런 암울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인간들’ 혹은 ‘악덕 고리대금업자’라는 돈과 연관된 유대인들에게 붙어 다니는 편견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 또한 유대인 박해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시대부터 시작된 유대인들에 대한 온갖 편견과 모욕적인 표현들은 다양하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사회를 더럽히고 위협하는 존재들로 ‘악마의 도구’, ‘악마의 피조물’, ‘페스트’, ‘세균’, ‘범죄자’, ‘이물질’, ‘기독교인 살인마’ 등으로 칭해지며 멸시를 당해 왔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민족국가가 정착된 유럽에선 교회와 국가의 분리와 세속화가 진행됐고, 유대인에 대한 증오도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즉, 종교적, 문화적 근원이 되었던 유대인 증오는 세속화와 함께 정치적, 사회적인 것으로 변화된다. 특히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형태인 독일나치시대엔 생물학적인 요소들을 부각시키는 인종주의적인 것으로 변화되었을 뿐이라고 골드하겐은 주장한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달라져도 변화되지 않은 것은 유대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편견이다.

이런 점에서 나치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은 유대인 증오가 수백 년간 뿌리내려져 있는 유럽이 그 학살의 토양일 수밖에 없었다. 또 독일은 히틀러의 광기가 먹힐 수 있었던 기본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히틀러의 정치무대인 독일에서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 딱지를 붙이고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켰던 행위들은 히틀러의 고유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미 예전에도 존재했던 것들이다. 히틀러는 경제적 상황과 사회적 문제들을 유대인들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며 ‘유대인의 우리의 불행’이라는 말처럼 유대인 증오의 감정을 증폭시켜 정치적으로 악용해 극악한 대량 학살까지 이끌어낸 인종주의 광신자다. 그리고 이에 동조한 또 이를 묵인한 독일인들은 유대인 증오로 똘똘 몽쳐있던 정신이상자들이 아니라 골드하겐의 주장처럼 보통사람들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증오감정은 유대인들과 접촉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영국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20세기 독일에서도 유대인의 수는 전 인구의 1% 정도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대도시에 거주했으며,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유대인들과의 접촉이 없었다. 또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에도 유대인은 독일의 해악이라는 편견과 함께 독일경제를 휘두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위협감이 극도로 악화된 경제상황에선 쉽게 먹힐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독일경제악화의 ‘속죄양’으로 처단된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편견의 뿌리는 한 시대를 넘는 오랜 역사를 거쳐 대량 학살도 가능케 한 위험한 것이었다.

20세기 히틀러의 광기를 대충매체가 톡톡히 담당해 전달했듯, 미디어는 단순한 정보의 전달뿐 아니라 특히 편견도 쉽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무서운 도구이다. 히틀러가 장악한 뉴스통신사, 신문 및 라디오와 영화 등의 미디어는 프로파간다를 통해 독일 전 국민을 세뇌시키는데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다. 나치에 동조하는 사람들만이 또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유대인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거의 없음에도 편견과 증오는 반인륜적인 유대인 대학살까지 가능하게 했다. 증오는 연속성을 갖는 모양이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젠 이슬람에 위협을 느끼는 증오의 감정이 또 다른 비극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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