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단종애사에 가려진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 무리수였을 수 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사랑이 꽃피울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민폐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무리 무력해도 일국의 왕이 폐위되고, 죽어가는 험난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 주인공이 한가롭게 사랑에 빠질 새나 있겠나 싶은 것이다.

결국 조선왕실 최고의 애사 속에도 찬란한 사랑의 꽃을 피우려던 작가의 의도는 예기치 않게 문채원에게 불똥이 튀었다. 먼저 문채원의 연기논란이 좀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아직 신인에 속하는데 벼락 주연이 된 괘씸죄도 다소 적용되고 있다. 또한 문채원이 아주 뛰어난 연기를 보이고 있지는 못하는데 사실은 그 절반 이상이 작가 책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채원의 연기 문제는 특히나 홍수현과 대립할 때 더 두드러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홍수현에게 주어진 상황과 대사는 감정 몰입이 대단히 수월하다. 경혜공주의 길례날 세령에게 그저 뺨 한 대로 그친 것도 그 분노 속에서 절제를 보이는 등 이상하게도 경혜공주에 대한 지문과 대사는 딱딱 맞아떨어진다. 물론 그것을 소화해내는 홍수현의 숨겨진 연기 내공을 가장 먼저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세령에게는 주어진 환경이 그야말로 한가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대사도 감정을 잡고 말하기에는 화려한 꾸밈말들이 지나치게 많다. 이래서는 이미숙이 온다 해도 감정 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베테랑이라면 대사를 손봐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문채원은 아직 작품 분석 능력도 부족할 것이고, 수정을 요구할 정도로 대스타도 아니다.

예컨대 경혜공주와 세령의 대화는 말귀를 알지 듣지 못하는 어린애와 어른이 감정을 토로하는 모습이나 진배없다. 경혜공주는 자신과 아버지 문종 그리고 나아가 세자의 안위까지 보태서 가슴을 짓누르는 상황에 한 마디 한 마디가 감정에 사무칠 수밖에 없다. 반면, 세령의 경우는 정권을 찬탈하려는 아비 수양과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순수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작가의 미사여구가 아무리 연기를 잘하려 해도 감정선을 툭툭 끊기 마련이다.

그뿐 아니다. 경혜공주는 슬픔, 분노에서 잠시도 헤어 나오지 못할 위급한 상황이 주어지고 있다. 자신의 일생만이 아니라 장차 문종 사후 세자를 보위할 충신 김종서와의 혼담이 세령으로 인해 망쳐졌으니 따귀 한 대로 그칠 일이 아니라는 것. 그런 치미는 분노 속에서도 세령에 대해 아련한 감정의 여운까지 남기는 섬세한 설정이 그녀를 돕고 있다.

세령에게 그런 친절(?)한 배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설정해놓은 캐릭터가 그저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인이라는 점이 문제다. 경혜가 세령에게 “세상이 다 아는데 네 아비와 너만 모른다”는 말을 했다면 보통의 경우 그 말의 배경을 알고자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령은 공주가 사라졌다는 말에 무작정 죽은 왕비의 능을 찾을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공주의 입에서 자신의 아비가 흉한 마음을 품었다는데도 그에 대해서는 한 발짝도 파고드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캐릭터의 본성에 반하는 무신경한 태도다. 그러니 자연 민폐 캐릭터의 부담이 늘어만 갈 뿐이다.

결국 애초의 주인공 문채원의 연기력 논란과 민폐 캐릭터 전락으로 인해 드라마 여주인공에 대한 무게중심은 빠르게 경혜공주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이제 시청자들은 박시후와 문채원의 러브라인보다 경혜공주와 정종이 걸어야 할 고난의 행보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작가는 애써 이 드라마가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임을 못박고 시작했건만 시청자는 그런 의도에 아랑곳 않고 경혜공주의 삶에 더 큰 애정을 품게 됐다.

그러나 시청자를 탓할 일이 아니다. 애초에 작가가 주인공인 문채원을 정상적으로 그려내지 못한 잘못이 오할 이상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 그나마 홍수현이 발군의 연기를 보이지 않았다면 그나마 드라마 시청률은 또 누가 책임질 수 있었겠냐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도 좋을 일이다. 이렇게 된 바에, 아예 스토리 라인을 대폭 수정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싶다.

경혜공주와 정종이 벌이는 단종 사수작전의 고통과 절망을 좀 더 깊이 파고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역사 속 정종은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돼 결국 처형당하게 되고 경혜공주는 관비로 떨어지게 된다. 작가의 상상력이 이 지점에서 발휘되어 경혜공주의 비극적 삶을 그려낸다면 민폐성 농후한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완성보다 훨씬 더 박수를 받을 것이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이다. 패자의 진실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단종애사를 건드린 이상 좀 더 가치 있는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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