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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차별과 시럽통[여해, 바다와 같아라]
백종훈 원불교 교무 | 승인 2020.07.06 10:41

[미디어스=백종훈 원불교 교무] 필라델피아의 소도시 글렌사이드 구릉에 오래전 그 지역 대지주가 살았던 우람한 석조건물이 우뚝 서 있으니 지금은 대학원 기숙사가 되었다. 새벽 좌선을 마치고 제각기 맡은 구역에 가서 비질을 하면 한 사람은 주방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그날 당번은 총장님이었다. 갓 구운 고소한 와플 냄새와 맑은 커피향이 다이닝 룸에 번져 가득할 즈음 시간 맞춰 청소를 마친 학생과 교직원들이 순서대로 음식을 덜어 제 자리에 앉아 감사기도 올리고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식탁에 놓인 단풍나무 시럽을 따뜻한 와플에 발라 한 입 베어 무니 겉이 바삭하게 부서지면서 촉촉하고 부드러운 속살이 혀에 닿는다. 거기에 시럽의 달콤함까지 더해지자 더할 나위 없이 풍미가 살아났다.

MRS BUTTERWORTH'S PANCAKE SYRUP

허나 흑인 도반 D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는 중년 흑인 하녀의 몸을 본 따 만든 용기에 담긴 시럽을 몹시 불편해했다. 그는 이유를 들려줬고 이후 노예제와 인종주의에 뿌리를 둔 ‘앤트 제미마’ 브랜드 메이플시럽을 식당에서 치웠다. 

미국인들이 행여 불쾌해할까봐 조식에 김치나 마늘 먹기를 삼가는 아시아계 소수인종이면서도 미국 내 또 다른 소수인 흑인들의 아픔과 처지를 잘 몰라 세심하게 배려하지 못해 안타깝고 미안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의시간 중 미국은 선진국이라고 백인 교수가 언급하자마자 흑인 급우 L이 심각한 인종차별을 언급하며 불같이 화를 내다 교실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교수의 말에 미국의 첨단기술과 앞선 교육시스템을 먼저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 이면에 숨겨진 미국 사회의 짙은 그림자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운전면허 1차 필기시험을 보러 가는 길에 백인 동네에서 멀어져 흑인 동네에 가까워질수록 아스팔트 노면이 깨끗하고 마치 새로 낸 도로 같아 의아해 할 때, 세금이 적게 걷히는 흑인마을 지자체가 예산이 없어서 겨울에 눈이 내려도 염화칼슘을 제대로 못 뿌려 그렇다는 얘기를 듣고도 그들의 가난에 무덤덤했던 나였다. 

면허시험 서류를 접수하러 차량국(Department of Motor Vehicles) 앞에 내렸을 때, 동행인과 나를 제외한 모두가 흑인인 분위기에 이유 없이 위축돼서 아무도 둘을 신경 쓰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소문으로 듣거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혹시나 해코지 당하지는 않을까 무서워하며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바라봤던 나였다.   

밤늦게 산책하다가 어둠 속에서 키 큰 흑인 청년이 나타날 때면 섬뜩 놀란 마음에 황급히 옆으로 물러서서 아무 일 없기만을 가슴 졸였고, 놀이터에 가다가도 흑인 청소년들이 모여 있으면 발길을 돌렸던 나였다.

한국인이 모두 개고기를 즐겨 먹거나 돈만 아는 수전노가 아니듯 흑인이라고 다 범죄자가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으나 흑인사회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낯섦에서 오는 두려움에 미디어로 전해지는 부정적인 정보가 아우러져 편견이 두께를 더하다 보니 은연중 배어나는 차별심을 숨길 수 없었다. 

우리네 마음에 더께더께 쌓인 때가 단번에 씻길 리는 없다. 어쩌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종차별 의식이 깔린 언어와 상징, 상품을 일상에서 덜어내는 데서 시작하여 불쑥불쑥 일어나는 선입견을 알아채 바로잡고 태도를 바루는 데 이르기까지 굳은 의지로 오래오래 계속하다보면 언젠가는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피 묻은 길에서 멀어진 성숙한 우리로 거듭나리라 낙관한다. 그것이 인간의 길이라면 포기할 수 없다.   

군자는 최선을 다해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다가 힘에 부친 나머지 중간쯤에 이르러 주저앉기도 한다. 그러나 나 공자는 그런 삶을 결코 그만 둘 수 없다 - 중용 11장  

단야선방 https://mayzephyr.tistory.com/

백종훈 원불교 교무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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