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은 한국 사회의 '슈퍼 갑(甲)'이다. 방송에 가장 민감한 '을(乙)'은 정치인들이다. 특히, 한나라당은 지상파 방송이 '좌경화'돼 정권을 잃어버렸었다는 피해의식을 여전히 갖고 있다. 실제 지상파 방송이 '좌경화됐는가'의 여부와 별개의 문제다. 다만, 이 피해의식은 지상파 방송의 영향력이 정권의 '색깔'을 결정지을 정도로 막강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실제로 지상파 방송이 '슈퍼 갑(甲)'의 위용을 드러낼 때는 '영원한 을(乙)'을 상대할 때다. 바로, 외주제작사이다. 지난 26일 진행된 공공미디어연구소 토론회에서 이성규 독립PD는 지상파를 "제작사에게 ‘앵벌이’를 시키고 ‘삥’을 뜯어가는 존재"로 규정했다. 상상 이상의 제작 협찬이 강요되고 그 과정에서 지상파가 또 상상 이상으로 돈을 떼어가는 것이 일상화된 지 오래라는 지적이다.

▲ 종편이 출범한 이후에도 지상파 방송이 '슈퍼 갑(甲)'의 지위를 누릴 수 있을까? 외주사들이 대거 종편으로 이탈하는 게 기정사실화 되고 있지만, 지상파 방송은 여전히 외주 제작 관행의 부조리함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인다

이 PD는 덧붙여 대부분의 외주사들이 종편을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동안 지상파 방송의 요구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한 외주사 대표는 "현재의 구조에선 아무리 양심적으로 해보려 해도 일상적으로 '상납'과 '로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현재 종편의 등장에 따른 지상파방송의 위기감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예능과 드라마를 제작하는 일선 PD들의 위기감이 상대적으로 큰 것 같으며 경영진들은 내부 단속하기에 치중해서인지 아니면 방송사 경영이 생각만큼 만만치 않단 걸 체험했기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덜한 것 같다는 분위기다. 하지만 방송사 구성원 대부분은 종편이 "3년 안에 자빠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채 자리가 잡히기 전에 하나, 둘은 먼저 망할 것이며 3년 안에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실제로 어떻게 될지 장담하기 어렵다. 시청률과 광고 시장을 비례로 놓고 경제적 수지타산을 맞혀보면 그럴 수도 있다. 주목할 것은 애당초 종편이 지상파 방송의 '슈퍼 갑(甲)' 지위를 허물기 위한 정치적 괴물로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정략적 특혜가 더 이상 없다는 보장은 없다. 또한 종편 사업자들이 한국 언론 시장에서 이미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들의 수지타산은 단순히 시청률 대비 광고만으로 구성되지 않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최소한 향후 3년간은 지상파 방송의 품질 저하가 불가피하다라는 점이다. 종편은 지상파보다 분명 좋은 조건을 외주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후발 주자가 지상파의 '고립'을 만들 수 있는 지점이다. 종편의 조건은 계약 단가가 높으며 계약 기간도 길다. 저작권을 창작자에게 준다는 사업자도 있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 편의 외주사 프로그램을 띄우기 위해 신문을 통한 기획기사, 보수 시민단체를 통한 캠페인까지 계획할 수 있다고 한다. 분명 외주사들은 대거 종편으로 흡수될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지상파방송은 종편 사업자가 언론 환경을 헤치는 '반 언론적' 행태를 하고 있다고 비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 때, 외주사들이 지상파방송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줄까? 다른 건 다 차치하고 이명박 정부를 굴욕적으로 건너온 지상파 방송에게 그런 윤리가 가당한지 되돌아 볼 일이다.

이제, 종편의 등장과 함께 지상파 방송들이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존재 이유와 사회적 처지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왔다. 그 동안 누려왔던 '슈퍼 갑(甲)' 지위는 현실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이제 유지하기가 어렵게 됐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공공재를 사용하는 지상파 방송들이 어떻게 변모할 것이냐이다. 분명한 것은 스스로 '슈퍼 갑(甲)' 권위를 해체할 수 있어야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고 생존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첫걸음은 그동안 무한에 가까운 '지위'를 누렸던 외주사와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다.

그 동안 너무 값 싸게, 외주사를 이용해왔다. 외주사들이 대거 종편으로 이동해버린다면, 지상파 방송의 품질 저하와 공백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내심 '종편이 시청률 몇 %나 나온다고 외주사들이 그리로 얼마나 가겠나?'의 안일한 발상으로 피해갈 수 있는 국면이 아니다. 외주사는 언제든 값싸게 부릴 수 있는 존재라는 지상파 내부 인식을 이제 폐기해야 한다.

예컨대, KBS 인기프로그램 <1박 2일>은 한 번 촬영에 6~70명의 스태프들이 움직인다. 이 가운데 방송사의 정규직은 PD를 포함한 연출팀 몇 명밖에 안 된다. 나머지 거의 대부분은 외주사에 속한 스태프들이다. 동일 노동을 하지만 인건비 차이는 상당하다. 프로그램 단가를 맞추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이 강조돼 왔다. 정말 그런가? 그렇지 않다.

작년 한 해, KBS와 MBC는 각각 434억 원과 975억 원의 엄청난 당기 순이익을 남겼다. 우선적인 고민은 공영방송이 단 1년 동안 이처럼 많은 돈을 남겨야 하는가에 있다. 그 와중에 KBS는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수신료를 올리려 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MBC는 미디어렙으로 제 잇속만 챙기려 하고 있다. 함께 방송을 만드는 이들에겐 '착취'에 가까운 횡포를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 제 밥그릇만 '업그레이드'하겠다는 것은 공영방송의 존재 이유가 될 수 없다.

현재, 외주제작비율은 40%를 기준으로 한다. 자회사 등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전체 제작물의 40%가 외주사를 통해 공급된다. 상황이 이러한데 프로그램을 공급받는 방송사는 수백 억 원의 이익을 올리고, 외주사들은 하루하루 날품팔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불공정한 경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논의되고 있는 '초과이익공유제'나 '성과 공유제' 같은 제도가 먼저 적용돼야 할 '대기업'이 지상파 방송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일감 몰아주기' 역시 지상파방송을 따라갈 기업은 없다.

초과이익공유제는 별개 아니다. 대기업이 해마다 설정한 목표 이익치를 초과하는 이익이 발생했을 경우, 대기업에 협력하는 중소기업의 기여도 등을 평가하여 초과이익(초과이윤)의 일부를 나누어 주는 제도다. '이익추구'가 목적인 기업들에서도 시행이 논의 중인데, 공영방송에서 도입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조중동매는 평소 지상파 방송에서 놀고먹는 억대 연봉자가 수두룩하다며 조롱해왔다. 지상파 방송은 이런 조중동매의 지적을 '천박하다'고 무시해왔다. 하지만 천박한 언론과 지상파 방송의 행태는 무엇이 또 얼마나 다른 것인가? 늦었다고 생각될 때, 정말 늦어버릴 수 있다. 종편의 개국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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