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과 일반 선수들끼리 대결을 펼치는 도전 형식의 TV 프로그램을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마린보이'의 역영은 엄청 났고, 대단했으며, 역사상 유례가 없는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예선에서의 우려, 결선에서 잘 해봐야 메달권에 그칠 것이라는 설레발을 완전히 잠재우고, 2년 전의 아픔을 완벽하게 씻어낸 멋진 역영이었습니다.

'마린보이' 박태환(단국대)이 또 큰일을 냈습니다. 박태환은 24일 오후, 중국 상하이 오리엔탈 스포츠센터 수영장에서 열린 2011 세계수영선수권 첫 메달이 걸린 남자 자유형 400m 결선에서 1번 레인에 배정된 불리함을 무릅쓰고 3분 42초 04의 기록을 세우며 세계기록 보유자 파울 비더만(독일), 떠오르는 신예 쑨양(중국) 등을 제치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박태환은 지난 2007년 호주 맬버른 세계수영선수권 이후 4년 만에 세계선수권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맛봤습니다. 아울러 2년 전 로마 세계선수권에서 예선 탈락했던 아픔을 씻고 명예 회복에 성공하며 자유형 중거리 부문 세계 최고 선수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습니다.

▲ 세계수영선수권 자유형 400m 우승자 박태환 ⓒ연합뉴스
그야말로 말이 필요 없는 멋진 경기였습니다. 자유형 지존이 왜 박태환인지를 스스로 보여줬던 한판이었습니다. 온갖 불리한 조건, 부담감을 떨쳐내고 이겨낸 우승이어서 이번 쾌거는 이전에 거둔 성과보다 훨씬 더 값졌습니다. 무더위와 짜증으로 막혀있던 일반 국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했던, 한편의 '시원한 리얼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박태환의 예선 레이스는 사실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앞서 열린 5조 예선에서 경쟁자들이 비교적 좋은 레이스를 펼쳐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예상했던 것보다는 조금 떨어진 3분46초74의 기록으로 힘겹게 결선에 올랐습니다. 예선 순위에 따라 레인이 배정되면서 박태환은 한 번도 뛰어보지 못한 1번 레인에 배정이 됐고, 이에 대한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건 사실입니다.

수영에서 양 끝 레인, 1번과 8번 레인에서 우승자가 나오는 경우는 정말 보기 드문 일입니다. 옆쪽에 벽이 있어 저항을 덜 받아야 하는 선수 입장에서는 당연히 꺼릴 수밖에 없는 위치가 바로 1, 8번 레인입니다. 또한 경쟁자들이 어떤 레이스를 펼치는지 양쪽을 살피는 것이 필요한데 끝 레인에서는 전혀 그럴 수 없는 것도 불리했습니다. 그야말로 오로지 감각과 실력만으로 모든 걸 보여줘야만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박태환 본인도 1번 레인에서 국제 대회 결선을 치른 적은 한 번도 없어 연습 때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정면 돌파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라이벌'로 꼽힌 중국의 쑨양이 반대로 가장 좋은 레인인 4번 레인에 배정됐고, 예선에서 비교적 좋은 기록을 낸 것도 박태환에게는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박태환은 이런 모든 악조건을 다 물리치고 오직 실력으로 모든 걸 잠재웠습니다. 처음부터 치고 나간 박태환은 훈련하면서 쌓은 기량을 모두 보여주며 줄곧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250m 지점에서 잠시 4위로 처지기는 했지만 막판 스퍼트가 워낙 좋은 만큼 순간적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하면서 경쟁자들이 손 쓸 틈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끝까지 그대로 유지하면서 4년 만의 세계선수권 정상이라는 성적을 낼 수 있었습니다. 중간 지점에서 조금 처지지만 않았으면 1번 레인에서 세계 기록을 작성할 수도 있었던 멋진 레이스였습니다.

반면 쑨양은 너무 정직하게 레이스를 펼쳤다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초반부터 치고 나간 박태환의 레이스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300m 이후에 가서야 뒤늦게 스퍼트를 했고 결국 박태환에 1초20 뒤진 3분 43초 24의 기록에 그치며 2위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대회 첫 금메달을 가져가겠다는 중국 수영의 야심찬 목표는 허무하게 끝난 반면 박태환은 '기회의 땅' 중국에서 또 한 번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보여주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세계 기록 보유자이지만 이번 대회에서 박태환에 밀려 3위에 머무른 파울 비더만은 "'박태환은 정말 멀리 갔구나. 더 이상 박태환을 보지 말자. 은메달 아니면 동메달만 생각하자"라고 생각했다"며 박태환의 기량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세계 기록을 깨는 데는 실패했지만 박태환은 자신의 페이스를 그대로 유지하고 이를 경기에서 그대로 보여주며 좋은 레이스를 펼쳤습니다. "쑨양과의 대결을 위해 참가한 것이 아니다. 열심히 훈련한 성과를 내고 싶을 뿐"이라면서 오직 자신과의 싸움이 이번 대회에서의 성패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밝힌 박태환은 어떻게 보면 세계 기록보다 더 값진 좋은 레이스로 새롭게 희망을 밝혔습니다. 불리함과 악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정말 인상 깊은 레이스를 펼친 박태환에게 더 많은 기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충분히 박수치고도 남을 좋은 경기였고, '최고, 지존' 어떤 수식어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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