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이슈를 기억해

미디어가 메시지이건, 맛사지이건 우리가 맥루한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전(全) 감각적인 미디어의 시대를 살고 있음은 분명하다. 날로 새로워지는 미디어 환경은 쿨(cool)과 핫(hot)한 미디어의 경계를 결정할 최소한의 시간조차 답답한 ‘버퍼링’으로 느껴지게 한다. 이러한 초/광/메가 기반의 실시간 사회에서 미디어에게 어제의, 몇 달 전의 심지어 몇 년 전의 이슈를 다시 추적해달라는 요구는 어떤 의미일까?

사채 광고, ‘무(無)’, ‘러쉬(rush)', ’즉시‘의 이미지

친구와 함께 대출을 받으러 은행에 갔다. 자격은 되지만 도저히 준비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경한 필수 서류 목록들을 받아보며 무담보, 무보증으로 당일 대출이 된다는 사채 광고가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작년을 뜨겁게 달궜던 사채 광고 논란이 떠올랐다.

남의 돈 빌리기가 쉽지 않더라는 경험과 상식에도 불구하고 은행 업무의 복잡함이 좌절과 피로감으로 느껴진 것은 아마도 ‘무(無)’, ‘러쉬(rush)', ’즉시‘ 등의 이미지로 각인된 사채업 광고의 영향이 클 것이다. 맘만 먹으면 손만 뻗으면 언제라도 필요한 금액을 융통할 수 있으리라는 망각적 착각의 감각이 더 자연스러울 만큼 미디어 환경은 무서운 것이다.

▲ 동아일보 2007년 6월14일 25면.
미디어의 책임

2007년까지 지상파 3사들은 사채업 광고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었다.(2006년 광고계약현황을 보면, 사채 광고 수주액이 KBS-16억6600만원, MBC-10억9000만원, SBS-9억8000만원에 달했다.) ‘무이자 송’까지 히트시키며 공중파를 점령했던 사채 광고들은 살인적인 고금리를 요구하는 상업적 메시지가 공공성을 핵심으로 (해야)하는 공중파의 정체성과 맞느냐는 비판에 꿋꿋했지만 결국, 드라마 <쩐의 전쟁>을 계기로 공중파에선 퇴출되었다.

그때 미디어는 연일 사채 광고에 출연하는 연예인의 문제로 뜨거웠다. 최수종, 김하늘, 최민식, 탁재훈 등 사채광고에 출연했던 톱스타들의 사회적 책무가 거론됐고, ‘대부업 광고=부도덕’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위력을 발휘했다. 발맞추어 공정거래위원회는 대부업체의 허위 과장·광고에 대한 조사를 벌인다고 법석을 떨었고, 법원은 때마침 최대금리 66% 이상을 받은 것이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놓았다. 재정경제부는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기민함으로 대부업체의 최대이율을 49%로 내리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했고, 시민단체들은 사채 광고를 중단하고 사채업의 이율을 30%까지 낮출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2007년 6월의 일이다. 그리고 잊혀졌다.

젠체하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소용돌이 텍스트성(vortextuality)'

알다시피 맥루한은 인터넷 기반의 디지털 사회를 알 지 못한 채, 인식의 지평을 거두었다. 애석한 일이지만 이후 기술 개발이라는 자본의 질주는 날로 미디어를 확대하고 있고, 정보의 접속/교류/참여 속도는 문자 그대로 빛의 속도를 위협하고 있다. 이 거대한 상황, 예측 불가의 환경은 때때로 참혹한 결과들을 만들어 내는데, ‘어떤 중대한(혹은 지배적인) 사건이 발생되면 칼럼니스트와 논평가들은 한동안 다른 문제에 대해 의견을 말하기가 어려워’지는 미디와 환경이 그 하나이다. 모든 미디어가 하나의 문제에 집중하고 그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휩쓸고 가버린다. 그리고 숨 고를 틈도 없이 새로운 ‘소용돌이(vortex)‘가 등장하는 순환이 미디어에 반복되고 있다. 영국의 문화학자인 개리 워널은 이를 ’소용돌이 텍스트성(vortextuality)'이라고 정의했던 바 있다. 우리에겐 숭례문 화재 사건이 가장 최근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유난히 디지털 사회, 기술 개발이 강조되고 있는 사회적 맥락에서 특히, 어느 사회보다도 심각한 ’소용돌이 텍스트성(vortextuality)'에 중독되어 있다.

‘황우석 사태’를 통해 비로소 과학 교육의 사회적 의미를 깨닫고, 'D-WAR 논쟁‘에 이르러 내러티브와 미장센이 민족주의를 거쳐 마케팅으로 완성되는 산업의 미학을 이해한다. 어디 그 뿐이랴? 월드컵에서부터 연예인들의 각종 대소사까지 소용돌이처럼 이슈를 반복하는 미디어에서 도저히 해방될 방법이 없다. 순식간에 전(全) 감각을 얼얼하게 자극하고 다음 이슈로 넘어가는 미디어 환경에서 마치 어제는 없는 것 같은 또 내일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 환상이 계속되고 있다.

미디어의 무책임이 만든 재앙

사채 광고 역시 미디어에서 떠들썩했던 것은 기억나는데...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실상은 다양해진 미디어 간에 서로를 정보원으로 삼으며 연예인의 신변에 대한 선정적인 문구들로 ’소용돌이 텍스트성(vortextuality)'을 만든 것 외엔 별로 한 일이 없다. 이 때, 사회적 대책이라고 강구된 것이 사채업의 이율을 ‘인하’한다는 날강도의 선전과 공중파 방송에서 사채업 광고를 퇴출시킨다는 쿨 하지 못한 자정이었다.

사채업 이율 인하 ‘선전’이 날강도인 것은 여전히 그 합법적 이자율을 49%로 제한한 무지막지함 때문이고, 공중파 퇴출이 쿨 하지 못한 까닭은 전(全) 감각적인 미디어 시대에 그것은 너무 핫한 자구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잊어버린 미디어의 무책임의 재앙은 고스란히 쿨한 미디어에 열광하며 사회의 무지막지함에 맨 몸뚱이로 맞서는 세대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실제로 금융감독원이 2006년 11월부터 3개월간 사금융 이용자 57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20, 30대 이용자가 전체 이용자의 76%에 달한다.) 소비를 강권 받으며, 자본만이 ‘명예’와 ‘능력’으로 인정된다지만, 사회적 자산을 형성할 기회조차 부재하여 기생할 수밖에 없는 세대가 그 사채 광고의 주요 소비자이고 또 피해자이다.

지금도 부정할 수 없는 미디어의 몫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소용돌이가 끝나고 또 다른 텍스트가 소용돌이가 되어 오기까지는 뿌옇게 가라앉는 약간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서민 경제를 사채의 빛으로 몰아넣을 것이 뻔했는데 왜 음지에 있던 사채를 양지로 끌어들이며 ‘사채’의 공급을 확대했는지, 이에 조응하는 자본의 감각적인 움직임은 어떠했고 또 적극적으로 호응했던 사회적 주체들은 누구인지 밝혀내야 한다. 그것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미디어의 몫이다.

내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은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이런 생각을 했다.

십년 전쯤 내수 경기 부양이 경제 정책의 핵심 기조가 되어 카드가 남발됐고, 이후 카드 남발에 따른 금융 산업의 부실을 막기 위해 카드 수수료를 고리 대금업 수준으로 인상했다.(현재, 카드 연체 금리는 24%대, 현금서비스 수수료율은 15∼24%대, 할부수수료는 12∼17%대 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은행의 외형적 규모만이 글로벌 경쟁력이라는 주술이 외쳐졌고, 은행들은 M&A 열풍에 휩싸이며 소액의 예대 마진(예금과 대출로 얻어지는 이익)들을 하찮게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금융권은 기본적인 금융 서비스 절차(담보, 자격 등)가 복잡해지고 비용(수수료 등)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고 상승했다. 하지만 가계 채무를 늘려 내수 경기를 진작시키는 정책 기조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따라서 1 금융권은 아니지만 쉽게 채무를 늘릴 수 있되 변제는 역시 어려운 금융 기법의 필요성은 여전하다. 이것이 사채의 대중화 될 수 있었던 요인인가? 그렇다면 누구의 의지가 개입되었던 것이지? 줄기 세포가 뭔지 이해하는데 오래 걸렸는데, 역시 뭔가 사건이 터지고 미디어에서 지루할 정도로 설명을 해줘야 이해를 할 수 있을라나...

그 전에 누군가 설명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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