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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그린라이트가 필요한 순간 이 영화를![고브릭의 실눈뜨기] 영화 '녹색 광선'
고브릭 | 승인 2020.06.19 13:45

[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최고의 여름 영화이자 가장 이상한 여름 영화를 한 편 소개하기에 앞서 질문을 하나 던진다. ‘녹색 광선’이라는 자연현상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녹색광선은 아주 맑은 날씨에 가끔 볼 수 있는데 일출/일몰시 태양의 가장 자리가 붉은빛이 아니라 초록빛으로 물드는 현상으로, 오늘 소개하려는 에릭 로메르 감독의 1986년 영화 <녹색 광선>도 여기서 모티브를 얻었다. (쥘 베른의 소설 『녹색 광선』도 같은 모티브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1986년 영화 <녹색 광선>

녹색의 행운을 찾아가는 험난한 여정

영화는 랭보의 싯구 中 ‘오! 시간이 되니 심장이 뛰는구나!’로 시작한다. 심장이 뛰긴 뛰는데 주인공 델핀(마리 라비에르)의 일상에 생긴 변곡점으로 시작된 불쾌한 심장박동이다. 델핀은 주관이 뚜렷하지만 예민하고 내향적이다. 그런 그녀에게 마음 맞는 친구와 세운 여름휴가 계획이 취소된 건 큰 위기다. 가족도 델핀과 함께 하지 못한다. 따뜻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델핀과 달리 가족들은 선선한 아일랜드로 이미 행선지를 정했다.

두 달 가까이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멋진 연애도 시작하고 싶은 델핀은 일단 친구들을 만나 행운이 찾아올 것 같다는 기대를 털어놓는다. 특히 ‘녹색’이 행운을 가져다 줄 거 같다고. 하지만 친구들은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린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남자를 만나지 않는 네 소심한 성격이 문제라고. 까다로운 성격을 고치지 못하면 주변 사람과 어울리지 못할 거라고. 깊이 낙담한 델핀은 결국 눈물을 떨군다. 

며칠 후, 억지로 의지를 쥐어짠 델핀은 친구의 가족이 운영하는 농장으로 향한다. 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지만 유일하게 마음이 통하는 사람은 사춘기가 될랑말랑한 여자아이와 그저 모래놀이가 즐거운 갓난아기뿐이다. 친구의 가족들은 델핀을 챙겨주는 것 같지만 채식주의자라는 델핀의 말에 고기의 뛰어난 맛과 영양학적 중요성을 설명하기 바쁘다. 식물을 바라보는 게 좋다는 델핀의 말에 아랑곳 않고 들판에 핀 꽃을 잔뜩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선물이라며 건네기까지 한다.

결국 농장을 떠나 혼자 바다로 향한 델핀. 해변에서는 본인처럼 혼자 여행 중인 스웨덴 소녀를 만나 동행한다. 하지만 스웨덴 소녀의 목적은 남자친구를 만드는 것. 스웨덴 소녀의 거침없는 실행력으로 생판 모르는 남자들과 합석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델핀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와 도망치듯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기차역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주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1986년 영화 <녹색 광선>

그래도 너는, 우리는 틀리지 않았어

‘델핀이 돌아다니며 눈물을 흘린다’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어느 곳이든 정착하지 못하는 주인공만 보여주는 영화가 주는 위안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너는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이다. 델핀이 선택한 채식주의자의 삶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다. 풍부한 감수성과 세심함은 타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까탈스러움이 아니라 자신과 주변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은 배려의 다른 모습이다. 오히려 외부의 무신경함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틀렸다고 말하며 소외시킨다.

에릭 로메르의 인터뷰집 『에리크 로메르: 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에는 제작과 관련된 재밌는 내용이 나온다. 녹색광선이란 자연현상은 수천, 수만 번이나 재현됐지만 로메르가 조사한 바에 한해 누구도 녹색광선을 촬영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누구나 촬영할 수 있지만 화산, 지진, 산사태 같은 ‘놀라운 일’이 아닌 ‘단순한’ 대상에 인내심을 갖지 못했던 탓이다. (요즘은 유튜브에 green flash를 검색하면 많은 영상을 볼 수 있다)

델핀이 행운의 색이라고 낙점 받은 녹색을 찾기 위한 여정은 우리 삶과 닮았다.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빨간불. 고통과 함께 흘러내리는 파란눈물은 녹색광선을 찾아나서는 나침반과 지도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다. 기대가 무너지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순간도 있다. 그런 때면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린다. 까다로운 여러 조건을 충족시켜도 단 몇 초만 존재하고 극히 일부만 관심 있는 짧은 순간. 하지만 그 연약한 순간을 기어이 재현한 영화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전설에 따르면 녹색광선은 그것을 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의 감정 속에서 더 이상 속지 않게 해주는 효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광선이 나타나면 헛된 기대와 거짓말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일단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다” - 『녹색광선』, 쥘 베른

고브릭  redcomet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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