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허찬행 칼럼] 노인 집단에 대한 미디어의 재현은 그들을 독자적인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는 ‘불쌍한’ ‘힘없는’ ‘의존적인’ ‘이기적인’ ‘고집스런’ 존재로 정형화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배우자와의 이혼이나 사별, 입양 등 다양한 형태로 가족이나 부모자식 관계가 재결합하는데도, 여전히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언론은 ‘계모’나 ‘의붓어머니’를 소환해 그들의 문제로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콩쥐팥쥐’나 ‘백설공주’, ‘신데렐라’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계모(의붓어머니)’는 자식들을 미워하고 학대한다는 전근대적인 이미지가 여전히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30년 동안 일제의 위안부 피해 만행을 알리고 사죄와 피해 보상 운동을 해온 정의기억연대는 부실회계, 회계 부정 의혹, 후원금의 사적 유용 의혹 등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검찰 수사를 받고 있으며, 윤미향 의원은 이미 ‘파렴치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 부실 회계가 오류라 하더라도 비판을 피할 수 없으며, 불법이 있다면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용수 여사(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성을 높여 이르는 사전적 정의에 따랐다)는 2차 기자 회견에서 “정대협(지금의 정의기억연대)이 할머니들을 고생시키고 끌고 다니면서 이용해먹고”라고 했으며, 회견문에는 “30년 동지로 믿었던 이들의 행태라고는 감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저는 당혹감과 배신감, 분노 등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KBS 보도 화면 자료

언론은 이용수 여사의 발언과 주장을 전하면서, ‘이용수 할머니’라 호명하였다. 2차 기자 회견 이후 일부 언론들이 ‘이용수 씨’, ‘이용수 선생’, ‘이용수 님’ 등으로 호칭을 달리하는 변화가 있었으나, 그는 어디까지 ‘이용수 할머니’였다. 사회적 공인으로서 그의 주장은 합리적 비판에 열려 있어야 하고, 사실 관계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로 언론이 호명하면서 그의 주장은 ‘불쌍하고 힘없는 할머니’의 외침으로, 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검증하는 것은 힘없고 불쌍한 할머니에게 해서는 안 될 일처럼 돼 버렸다고 생각한다. 일부 사실관계가 다른 부분에 대한 의문은 ‘배후설’로 공격 받고, 그의 주장에 대한 비판은 피해자 할머니에 대한 2차 가해 행위라고 언론은 다루었다.

부모에 의한 자녀 학대나 살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가해자나 범인은 ‘의붓어머니’나 ‘계모’라는 점이 부각된다. 자녀가 있는 여성이나 남성이 재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증가하는 시대적 상황과는 동떨어진 전근대적인 시대 인식이 고스란히 언론을 통해 선입견으로 이어진다. 자녀에 대한 학대나 살해는 친부모나 새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양육을 책임져야 하는 데서 비롯되는 보다 구조적인 문제다. 즉, 친권이나 양육권이라는 명목으로 자격 없는 부모들로부터 학대당하는 어린 아이들을 위험에 방치하지 않는 길은 친권이나 양육권을 박탈하여 학대나 살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공동체가 이들의 양육을 책임지는 제도적인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언론은 중대한 자녀 학대나 살해 사건이 발생하면 ‘부모가 어떻게 자기 자식을 저렇게 하는 가’라는 수준에서, ‘친부모가 아닌 의붓어머니(계모) 또는 의붓아버지(계부)니까 저런 참혹한 짓을 했다’는 편견을 조장하는 보도 행태가 이어져 왔다.

한 주체로서 ‘OO씨’나 성명 뒤에 사회적 지위 등을 표기하면 될 것을 ‘할머니’를 소환해 공인의 발언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과 비판에는 소홀하고, 자녀 학대나 살해에 대한 친권이나 양육권의 한계 등 본질은 다루지 못하면서 ‘계모’ 또는 ‘의붓어머니’를 호명해 자녀 학대나 살해의 주체로 편견을 조장하는 언론의 행태가 개선되길 바란다. 보다 급진적인 제안을 하자면 이제는 언론 보도 상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의붓어머니 또는 계모 따위의 편견적인 표현을 없애보는 건 어떨까.

* 허찬행 청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언론인권통신' 제 863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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