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경찰서가 KBS 장 모 기자를 전격 압수수색하기 전 KBS의 관계자가 경찰 수뇌부를 만났다는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관계를 떠나 무슨 얘기가 오고갔을지는 능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하지만 이후 영등포 경찰서는 전격적인 압수수색으로 KBS를 극단적 '당황'으로 몰아넣었다.

장 모 기자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진 당일 KBS는 '혼란'과 '혼돈'의 모습이었다. 홍보 담당자들은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간부들의 발언은 엇갈렸다. 뿐만 아니라 영등포서에 출입하는 기자들 역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압수수색이 있던 날 아침 2명의 영등포서 출입기자들이 미디어스에 전화를 걸어 사건의 경위를 물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 어떤 관계자는 조심스레 이런 말을 했다. "조현오 청장이야 떠날 사람이 아닌가. 경찰에는 수사권 독립 문제가 걸려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경찰 조직에 남아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이번 사건을 통해 정치 검찰과 다른 경찰의 본 모습을 각인시켜야 할 때란 얘기다. 수사권 독립의 여파는 이처럼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의미를 발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민주당 당대표실 도청 의혹과 관련해 경찰 조사에 응하지 않았던 한선교 한나라당 의원이 13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박희태 국회의장을 따라 공항 귀빈실로 들어가려다 제지받자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서고 있다ⓒ오마이뉴스 남소연
영등포경찰서는 '면책특권'을 주장한 한선교 의원의 발언에 선을 그은 것으로 알려진다. 면책특권 여부는 사법부가 판단할 문제라는 것이다. 한 의원은 경찰의 요구대로 수사를 받고 이후 사법 당국에 의해 발언의 면책 여부를 판단받아야 한단 까칠한 '원칙'인 셈이다. 경찰이 힘 있는 여당의 실세 국회의원을 겨냥해 까칠하게 '원칙'을 앞세우는 장면은 확실히 낯선 풍경이다. 경찰은 '강제구인'을 검토하고 있단 이야기를 흘렸다.

지금까지의 전개로 볼 때, 영등포경찰서는 묵계의 '선'을 넘은 것으로 보인다. 영등포경찰서가 한나라당 문방위 소속 국회의원들의 보좌진들도 조사할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장 모 기자가 핸드폰과 노트북을 분실해 누가 도청했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 없다면, 어떻게 문건을 입수했는지의 경위에 집중하겠다는 역추적 방식으로 보인다.

경찰의 이러한 방침은 더디긴 하나 수순대로 수사에 임할 것임을 예견하게 한다. 사건을 직접 고발한 민주당 역시 이번만큼은 경찰이 '순순히 물러서지 않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 KBS가 조현오 청장을 비롯한 경찰 수뇌부를 당연히 '단속'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등포경찰서가 판을 벌인 까닭에 대해 나름 확신을 갖고 있는 모양새다.

맞다. 레임덕이 찾아온 것이다. 공권력의 주체들은 이제 '공'의 주어가 누가 될 것인지의 여부에 따라 존재의 의미를 달리할 시간으로 접어들고 있다. 사건 초기 언론계 호사가들은 KBS가 경찰 수뇌부와 '모종의 딜을 했을 것'이란 음모론적 시각을 많이 나타냈다. 만약, KBS가 정말 도청에 관여된 것이라면 아무런 대비 없이 이번 상황을 맞진 않았을 것이란 일종의 정황 추론이었다.

하지만 영등포경찰서는 전격적인 압수수색으로 이런 추론들을 무색하게 했다. 경찰은 예견할 수 있는 행동반경을 뛰어 넘었고, 익숙한 결론이 아닌 전혀 새로운 상황을 초래할 각오를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압수수색 이후 KBS가 벌이고 있는 행태에 격분하며 사실상 증거인멸과 범죄 은폐 공모가 이뤄지고 있어 장 모 기자를 구속 수사해야 하는데 경찰이 KBS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민주당을 비롯한 대체적 분위기는 '경찰을 기다려보자'는 것으로 모아지고 있다. 경찰이 아니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경찰을 해야 하는 누군가들이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지적이다.

영등포서의 수사 의지는 이제 '경찰에 가지 않겠다'는 한 의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진정성을 확인해볼 수 있게 됐다. 앞서, 말했듯 '면책특권'은 사법부가 판단하는 것이지 의원 개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영등포서여, 수사하라. 한 번도 수사해보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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