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반쯤 감긴 눈을 부비며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집어 들자 1면에 실린 가슴 찡한 편지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 편지의 주인공은 씨랜드 화재로 아들을 잃자 국적도 포기하고 훈장도 반납한 채 뉴질랜드로 훌쩍 떠난 전 국가대표 하키선수 김순덕 씨였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씻는 데 9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는 김 씨.

하지만, 그런 김 씨 가족을 더욱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 소식을 접했다는 김 씨는 편지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고 책임을 서로 떠넘기며 고통은 어민이 고스란히 떠안는 것을 보고 9년 전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그 많은 아이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던 그때가…. 한국은 9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건가요.”

93년 이래 대형 참사 20건 가운데 제대로 된 백서는 2개

▲ '세계화와 그 불만' 책 표지.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만든 수많은 후진국형 참사들… 이젠 잊힐 만하다 싶으면 또 다시 어디선가 불쑥 대형 사고가 터져 나와 입을 다물게 만드는 우리의 현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지난 1993년 이래로 수십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참사 20건 가운데 제대로 된 백서(white book)가 나온 것은 단 두 건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사고가 터지면 책임소재를 가리는 데만 급급하고 관계기관들이 저마다 서로에게 잘못을 떠넘기느라 혈안이 된 와중에 정작 중요한 반성과 대책은 늘 뒷전이었던 것이다. 불과 얼마 전, 불에 타 허망하게 무너진 숭례문은 ‘과거’를 보는 우리의 수준이 어디에 와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쓰린 과거는 숱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교훈이 되지 못했다.

이미 내려진 어떤 결정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재앙을 불렀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누구의 책임인지를 분명하게 가려내는 것은 물론 기본이다. 하지만, 더 긴요한 것은 실수로, 시행착오로 판명된 정책에 대해 잘못이었음을 명백히 인정하고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꼼꼼히 되짚어봄으로써 더 나은 개선책과 대안을 찾는 일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조지프 E.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z)는 세계화를 규율하는 3대 기구의 하나인 세계은행(World Bank)의 선임 부총재 겸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다. 그런 그가, 민영화에 원론적으로 찬성하고 세계화가 가진 긍정적인 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가졌음에도 어째서 가장 혹독한 세계화 비판자가 되었을까.

세계은행 선임 부총재의 혹독한 세계화 비판

저자에 따르면, 국제통화기금(IMF)이 세계화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은 그 방식의 획일성 때문이었다. 경제적 위기에 빠져 구제 금융이라는 국제적 원조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수많은 나라들에게 “정책이 미칠 효과를 고려하지도 않은 채 시대에 뒤떨어지고 부적절한 해결책”을 ‘표준적’이라는 미명 하에 ‘만병통치’식으로 처방한 것이 문제였다. 동아시아 경제위기에 대한 IMF의 잘못된 진단과 그에 따른 처방은 대공황 시대의 ‘근린 궁핍화 정책’과 유사한 경기침체의 확산이라는 ‘전염’을 부추겼다. ‘지분-대출 교환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러시아의 민영화는 한 줌도 안 되는 과두정치 지배자들이 하루아침에 억만장자가 되어 신속하게 해외로 돈을 빼돌리는 ‘무정부주의적 도둑질’로 귀착됐다.

▲ 1998년 당시 IMF 총재 미셸 캉드쉬(Michel Camdessus)와 인도네시아 대통령.
저자는 재정긴축과 민영화, 시장자유화라는 워싱턴 합의(Washington Consensus)에서 나온 IMF의 주문(呪文)을 그대로 따른 나라보다 그렇지 않은 나라의 경제회복이 훨씬 더 괄목하다는 점을 풍부한 사례를 통해 논증하고 있다. “워싱턴 합의에 의해 수립된 정책들의 순수효과는 다수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수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부유한 사람들에게 이득을 안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많은 경우 상업적 이익 및 가치가 환경, 민주주의, 인권, 사회 정의 등에 대한 관심을 대체했다.”

원조를 받은 나라들은 경제 주권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만 했다. 지난 1998년 당시 공개된 사진 한 장은 IMF와 원조를 받은 나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당시 IMF 총재 미셸 캉드쉬(Michel Camdessus) 앞에서 잔뜩 구부린 자세로 서명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라. 저자는 IMF가 본래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고 단언한다. 그런데도 IMF는 해당 국가의 ‘투명성’을 변명거리로 내세우며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때문에, “IMF 자체가 해결책의 일부라기보다는 문제의 일부”가 돼버렸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세계 각지에서 반 세계화 운동이 일어난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IMF 원조 받은 나라, 경제주권 상당 부분 포기

▲ 경향신문 2월29일자 4면.
하지만, 그런 저자를 더욱 질리게 만든 것은 명백한 실패로 드러난 정책적 오판에 대해 IMF가 보인 태도였다. 문제가 드러났는데도 중요한 정책결정자들이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IMF는 왜 그런 실수가 발생했는지, 모델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다음 번 위기를 예방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절 자문(自問)하지 않았다.” 반성 없는 과거가 교훈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IMF는 자유방임주의에 가까운 이념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 그 이념에 배치되는 증거들은 간단하게 무시해 버렸다. 동반성장과 빈곤 퇴치라는 고유의 임무가 뒷전으로 밀려나도, 이념적 정치적 결정의 열매는 권력자들의 이익과 믿음에 들어맞는다. IMF와 WTO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선진국(특히 미국!)의 재무장관들과 중앙은행 총재들이다! 그리고 퇴임한 뒤 그들이 갈 곳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세계적인 금융회사들이다!

때문에 저자는 “세계화가 애당초 취지대로 작동하게끔 만드는 데 요구되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지배구조의 변화”이며, ‘비밀주의’를 넘어 ‘정보에 대한 공개적 접근의 중요성’과 ‘공개적 토론의 가치’를 거듭 강조한다. 과거의 실수로부터 교훈을 찾지 못한 채 세계화가 이대로 계속된다면, 세계화는 결국 개발과 성장을 촉진하기는커녕 빈곤과 불안정만을 낳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런 분석과 비판은 저자가 가진 전문성뿐만 아니라 직접 세계 방방곡곡을 발로 뛰는 열의와 실증적 정신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에 값한다. 실제로 저자는 “누구든지 그 나라 시골을 직접 찾아가 보지 않고는 한 나라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그러니 세계화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먼저 바뀌는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사람이 있다. 국토 개발과 관리를 책임져야 할 새 장관이 부인 명의로 시골에 사놓은 땅뙈기가 투기 논란을 부르자 잽싸게 밭으로 일궈놓는 기지를 발휘했다 한다. 새 정부의 모토는 다름 아닌 ‘국민 섬김’의 정치! 그런데 문제의 그 장관은 그 땅을 직접 가본 것은 고사하고, 농사지을 마음 또한 눈곱만치도 없었으리라. 지극히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겨야 할 새 장관의 이런 창피한 수준도 독서의 결과로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생생한 교훈이 된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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