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KBS 강릉방송국에서 정규직 PD로부터 "짤라버린다"는 계약해지 위협을 받고, 협의 없는 임금삭감과 계약해지를 통보 받았다고 피해를 호소하는 12년차 라디오 작가에 대해 KBS 감사실은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직장 내 괴롭힘'의 객관적 증거가 없고, 프리랜서는 KBS 소속이 아니며, 피신고인들의 행위가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유발한 행위였다고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를 호소한 박경희 작가는 정규직 PD의 계약해지 위협 행위와 관련해 당사자에게 공개 사과까지 받은 바 있다. 박 작가는 KBS 강릉국이 '방송작가 표준계약서'에 따른 임금협의 없이 박 작가 임금의 약 30%를 삭감했으며, 계약해지 통보 시에는 표준계약서를 근거로 내세웠다고 토로했다. 무엇보다 KBS는 프리랜서를 직장 내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남기게 됐다. 지난해부터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의 문제점 역시 고스란히 드러나게 됐다.

여의도 KBS 사옥 (KBS)

최근 KBS 감사실은 박 작가의 '직장 내 괴롭힘' 신고에 대해 "신고인이 제시한 신고내용은 모두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감사결과를 당사자에게 통보했다. KBS 감사실은 우선 정규직 PD가 이른바 '갑'의 위치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KBS 감사실은 박 작가가 방송작가 표준계약서를 체결한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KBS 강릉국 이 모 국장, 경 모 부장, 전 모 PD 등 피신고인들이 '직장 내 지위 및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 하였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했다. 또한 피신고인들이 제작업무를 총괄하는 직위에 있거나 PD인 점을 들어 프로그램 제작 역량 등에서 '사실상 관계의 우위'에 있다고 봤다.

이어 KBS 감사실은 ▲신고인의 주장과 피신고인들의 진술이 상반되고, 주장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존재하지 않음 ▲‘직장 내’라는 소속 개념을 전제로 한 근무환경 악화 여부에 대한 판단 또한 프리랜서의 지위와는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음 ▲피신고인들의 행위와 신고인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 내지 근무환경의 악화 사이에 뚜렷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려움 등의 이유를 들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는 행위의 존재',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 등의 행위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성립하는데, 박 작가의 신고내용 모두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KBS 감사실은 "객관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박 작가는 "짤라버린다" "처리한다"는 전 모 PD의 계약해지 위협을 받고 문제를 제기해 공개 사과를 받은 적 있다. 2018년 12월 11일 박 작가는 이 일로 당시 KBS 강릉국장에게 탄원서를 접수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2018년 12월 14일 KBS 강릉국장은 국장실에 전 모 PD, 편성부장, 박 작가를 불러모아 전 PD가 박 작가에게 공개사과를 하도록 했다. 전 PD가 박 작가에게 한 사과발언은 "회사를 시끄럽게 하고 박경희 작가에게 상처를 드린 점 사죄드립니다"였다.

KBS 강릉국의 국장과 편성부장이 전 PD와 입사동기들로 바뀌고 난 직후인 2019년 6월 12일, KBS 강릉국은 제작비를 이유로 편성부 프리랜서 9명의 원고·출연료 삭감을 통보했다. 9명 중 2명은 28%, 7명은 10~12% 임금을 삭감한다는 내용이었다. 박 작가는 28% 삭감 대상자로, 임금삭감에 대한 강릉국 설명은 없었다. 박 작가가 KBS와 체결한 '방송집필 표준계약서'에 따르면 계약 내용의 변경 시 상호 합의하에, 서면에 의해서만 변경할 수 있다. 사전 협의절차는 없었고 그해 7월 1일부로 박 작가 원고료는 28% 삭감됐다.

이런 상황에서 '방송집필 표준계약서'가 박 작가 계약해지 통보의 근거로 쓰였다. KBS 강릉국은 지난 2월 박 작가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KBS는 2018년 10월 방송집필 표준계약서를 시행했다. 방송산업계 비정규직 문제가 터져나오던 시기로, 방송작가 표준계약서 문제가 국정감사 지적사항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박 작가는 지난해 2월 KBS와 표준계약서를 작성했다. 표준계약서는 프로그램 개편을 계약 만료 시점으로 규정하고 있다.

KBS 강릉국장은 박 작가 계약만료 이유에 대해 "프로그램 내용과 포맷, 인력구조의 변화, 평가결과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한 것"이라고 답했다. 박 작가가 맡았던 프로그램은 KBS 전체 지역 라디오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박경희 전 KBS 강릉방송국 작가 (사진=미디어스)

박 작가는 계약 해지의 배경에 자신의 내부 고발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박 작가는 전 PD에 대한 탄원서 접수 외에도 전PD, 경 편성부장을 상대로 직장 내 성희롱을 신고한 바 있다. 해당 사건에 대해 KBS 성평등센터가 2019년 7월 29일 내린 결론은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이다. 그러나 성평등센터는 박 작가가 허위의 사실을 신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부당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관리 감독할 것을 강조했다.

"업무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공식적 회식자리이자, 일반 식당에서 피신고인1 등이 여성 프리랜서에게 '춤을 춰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행위 등은 부적절한 언행으로 판단되며, 보강증거가 존재할 경우에는 성희롱으로 판단될 가능성도 상당하므로 주의를 요한다. (중략) 특히 본 사건의 경우, 비록 인정사실이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되지는 않았지만, 피신고인 1 행위 자체의 부적절한 측면 때문에 성희롱이 성립할 개연성이 있었던 점, 피신고인 2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화를 상당시간 이어나갔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신고인이 피신고인으로 하여금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허위의 사실을 신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신고인에게 부당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관리·감독할 것을 강조한다" (2019년 7월 29일 KBS 성평등센터 결정문)

박 작가는 지난 2월 미디어스와의 인터뷰에서 "탄원서를 낸 것이 계약 해지의 결정적 계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 작가는 "탄원서를 계기로 PD가 작가에게 사죄를 한 것이지 않나. 그것은 정규직 PD로서 자존심상 도저히 허용이 안 되는 것"이라며 "그래서 지금까지도 저를 꾸준하게 내보내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연장선상에서 성희롱 사건 신고도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토로했다.

무엇보다 KBS 감사실이 "‘직장 내’라는 소속 개념을 전제로 한 근무환경 악화 여부에 대한 판단 또한 프리랜서의 지위와는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결론 내리면서 KBS에서 프리랜서는 '직장 내 괴롭힘'을 겪더라도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피해를 구제받을 수 없다는 점이 확인됐다. 프리랜서, 특수고용 노동자 등 방송계 인원 상당수를 차지하는 인력은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을 적용받기 위해서는 근로계약 관계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한계가 드러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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