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옳다’,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참다’, ‘인내하다’의 기준이 그렇다.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분명 참는 일은 선한 일이고, 옳은 일이었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 참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라는 말은 진리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다만 연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상사라는 이유만으로, 시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상식에서 벗어난 무례한 요구를 하여도 불평 한마디 하지 못하고 고통을 감내했다. 무례하게 행동하는 사람도, 그것을 참는 사람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인식이 그랬고, 가정에서 이루어진 교육도 그랬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상식에서 벗어나도 반론을 제기하지 말라고 배웠다. 개중에 멋모르고 잘못을 정정하려 하면 버릇없고,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 찍혀 가정교육까지 운운했다. 직장생활에서는 상사가 하는 일에 군말 없이 따르고 공은 상사가 독차지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아들이라는 이유로 모든 재산을 상속받고, 다만 딸이라는 이유로 모든 상속에서 밀려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참는 게 미덕이고, 참는 일은 옳은 일이라고 학습되었고, 그렇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는 장손 집 장손이었다. 할머니도, 친척도 오빠를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했다. 세계는 오빠를 중심으로 구축되었고, 오빠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오빠는 아버지 다음으로 높은 서열에 있었고, 남부럽지 않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집안의 작은 폭군이었다. 아버지가 없으면 기분에 따라 동생들에게 마음대로 행동해도 상관없었다. 부모님이 외출 시 점심을 사 먹으라고 준 돈을 독차지해 자기가 사고 싶은 장난감을 사도 나와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하지 못한 이유는 오빠의 협박 때문이었다. 당시 구석에 몰아넣고 아버지, 어머니께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은 진심처럼-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때 머리를 짓누르는 공포였다- 느껴졌다. 점심값으로 장난감을 사서 놀고 있는 오빠를 보면 화가 나기보다 슬펐다. 매번 반복되고, 매번 참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만 참으면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많은 불합리한 일을 넘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생각했다. 사건이 있기 전까지. 함께 조율하고 고민하여 결정한 사항을 나와 의논 한마디 없이 파기하고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일이 있었다. 이렇게 행동해도 상대가 나를 이해해 줄 거야, 라는 생각이 아니라 이렇게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례한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한 것은 나였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은 결과이다. 내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나만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참지 않기로 했다.

참으면 호구가 된다. 누구도 나를 먼저 존중해 주지는 않는다. 나의 권리를 지키고, 존중받고 싶다면 싹수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서로 불쾌한 말이 오가고 관계가 불편해져도 분명하게 내 생각을 말할 필요가 있다. 인내가 미덕이라고 믿던 시대는 지나갔다. 건강하고, 밝고, 긍정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내 안에 남아 있는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말로 내 기분을, 생각을 분명하게 전하는 일은 중요하다.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데 분명한 의사 표현은 필수조건이다. 기분 나쁘면 왜 기분 나쁜지 정확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충돌이 싫고, 불편한 관계가 싫고,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워 싫은 것을 싫다고, 옳지 않다고, 불합리하다고 말하지 못한다면 상대는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 존중받고 싶다면 불화가 발생하더라도 내 생각을, 기분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해야 한다. 당시는 서로 얼굴을 붉히며 불쾌할 수 있지만, 발전적인 관계를 위해서는 이것이 옳다. 감정을 발산하고, 표현할 수 있을 때 개인도 사회도 건강해진다.

김은희, 소설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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