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고향을 다녀오며 <혼불문학관>에 들렀다.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노봉리, 대하소설 <혼불>의 무대가 된 <혼불문학관>에도 봄기운이 서렸다. 얼음 덮힌 계곡 아래 물소리는 청아했고 대지는 조금씩 몽실몽실한 속살을 열어 보이는 참이었다.

여러 차례 찾은 <혼불문학관>이지만 올 때마다 계절 잔치가 새롭고, 뭐랄까 성지를 찾은 경건함처럼 사뭇 긴장된다. 최명희 작가의 혼이 서린 전시실에 들어서려면 옷매무새도 고치고 심호흡을 하는 등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처음, 아무 준비없이 전시실을 들어섰다가 그만, ‘헉!’하고 가슴이 멎을 뻔한 충격을 받았다. 작가의 애장품과 더불어 혼불의 집필과정, 각종 문학사적 자료 등이 전시된 그곳에서 이런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 한겨레 2007년 12워1일자 12면.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작가가 평생을 바쳐 집필한 <혼불>은 20세기 말 한국문학의 큰 획을 그은 문학사에 길이 남는 명작이다. 박제되어가는 민속 문화를 생생하게 복원, 재현했다는 평과 함께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운율을 살려 모국어의 감미로움과 미려함, 풍성함을 돋보이게 했다는 찬사를 받아온 작품을 남긴 저자는, 정작 원고를 쓸 때 ‘온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는 새기는 것만 같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문단의 말석에서나마 글 쓰는 일을 소망했던 나에게 얼마나 숨막히는 일갈이던가! 게다가 국어사전을 시집처럼 읽었다는 작가의 고뇌어린 하소연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그리하여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만일 그것이 어는 날인가 새암을 이룰 수만 있다면,
새암은 흘러서 냇물이 되고, 냇물은 강물을 이루며, 강물은 또 넘쳐서 바다에 이르기도 하련만,
그 물길이 도는 굽이마다 고을마다 깊이 쓸어안고 함께 울어 흐르는 목숨의 혼불들이,
그 바다에서는 드디어 위로와 해원의 눈물나는 꽃빛으로 피어나기도 하련마는,
나의 꿈은 그 모국어의 바다에 있다.
어쩌면 장승은 제 온몸을 붓대로 세우고, 생애를 다하여, 땅속으로 땅 속으로,
한 모금 새암을 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마을, 그 먼 바다에 이르기까지……. ’

고백하자면, 나는 그 글 앞에서 숨죽여 컥컥 울었더랬다. 한 작가의 사투어린 모국어와의 열애 앞에서 거죽만 말쟁이, 글쟁이로 허투루 살아온 나의 전력이 부끄럽고 초라하여 속죄하는 마음으로 오래 오래 속죄했다.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니 그분이 내 마음을 부드럽게 다독이며 알았으니 됐다고, 이제 네 죄를 사함받고 큰 세상에 나아가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이라도 건져 올리라고 격려해주는 것 같았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갑자기 영어교육의 광풍이 거세졌다. 빈부격차에 따라 영어 교육의 실태도 명암이 극명해졌다. 영어 잘하는 사람은 각종 혜택과 더불어 출세가 보장되고, 영어 못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보통 국민 축에 들기도 어려워졌다. 가까운 친구와 지인들의 자녀들도 벌써 여럿 영어 유학을 떠났지만 우리 형편에 영어 유학은 엄두도 나지 않을뿐더러 각종 사교육에 대처할 엄두가 나지 않아 허탈해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어 권하는 사회가 무지하게 불안하고 슬픈 심사를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영어 권하는 사회와, 영어를 강권하는 위정자와, 그 사이에서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을 보통의 부모와 그 자녀들에게 나는 <혼불>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남원에 <혼불마을>이 있다면 최명희 작가가 태어난 전주 한옥마을에는 <최명희문학관>이 있다. 거기에서도 똑같이 작가의 혼을 만날 수 있는데 최명희님은 생전의 육성으로 너무나 생생하게 말한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고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기 때문에 저는 제가 오랜 세월 써오고 있는 소설 혼불에다가 시대의 물살에 떠내려가는 쭉정이가 아니라 진정한 불빛 같은 알맹이를 담고 있는 말의 씨를 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혼불을 통해서 단순한 흥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수천년동안 우리의 삶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우리 조상의 순결과 삶의 모습과 언어와 기쁨과 슬픔을 발효시켜서 진정한 우리의 얼이, 넋이 무늬로 피어나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훼손되지 않은 순결한 우리의 모국어를 살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언어가 사실 모든 것이 이렇게 바뀌고 또 새로워지고 있는 이 시대에 변하지 않는 고향의 불빛같은 징검다리 하나가 되서 제가 알고 있는 언어들을 한 소쿠리 건져내서 제 모국에, 제가 살다가는 모국에 바치고 싶습니다.”
(1998년 6월1일 제5회 호암상 수상 소감중)

모국어로 방송하는 일에 참여하면서 얼마나 더 아름다운 정신을 살리려 노력하는지 가끔 되돌아보게 된다. 모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를 존경하고, 그 모국어 몇 줄에 감동하면서 어느 날 문득, 이런 모국어조차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장애인들에게 매우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시각,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일을 계획중이다. 라디오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훼손되지 않는 순결한 모국어부터 살리고 보는 일, 사실 좀더 많은 국민들과 소외계층에게 더 필요한 일이 아닐까.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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