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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분노, 정치에 숫자를 깨우치다?[김민하 칼럼] 생명력을 얻는 것은 사람이 아닌 숫자인 세계
김민하 / 저술가 | 승인 2020.03.24 08:51

[미디어스] 이른바 n번방 사건 등 다양한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수사 및 처벌 강화, 2차가해 방지 등 내용이 담긴 국회 청원 1호를 다룬 국회의원들과 고위공직자들의 발언을 보았다. 우리가 정치에 너무 큰 환상을 가진 게 아닌가 싶어진다.

우리가 이런 저런 문제를 겪고 있다고 호소하면 정치가 해결 방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국회 청원은 사실상 문제의 내용은 물론 해결 방법까지 포함한 형태로 제출됐다. 국회의원들 입장에선 누가 밥을 떠먹여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국회는 이른바 딥페이크 포르노에 대한 처벌 조항 하나를 추가하는 걸로 퉁쳤다. 그리고서는 10만명에 이르는 청원 참여자들의 의지를 담아 ‘n번방 방지법’을 만들었다고 자화자찬도 했다. 

국회 법사위에서 국회의원들과 고위공직자들이 했다는 발언은 그들이 디지털성범죄 문제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지금 법 체계에선 합당한 처벌이 어렵거나 ‘솜방망이’에 그치는 것이 문제인데도 현행 법에도 처벌 조항이 있는데 왜 개정안이 필요한지 의문이라는 취지의 발언이 오간 것이다.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개정 성폭력처벌법)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디지털 성범죄 근절과 강력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연합뉴스)

왜 이럴까? 공직 사회가 나이 많은 엘리트 남성 위주로 구성돼 있다는 것부터가 문제다. 이른바 n번방 사건이 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게 지난해 하반기부터였는데도 이들은 “잘 모른다”고 했다. 관심이 없는 것이다. 딥페이크 포르노 피해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최소한의 감수성이 없는 거다. 그나마 “n번방과 딥페이크는 다르지 않느냐”고 말한 사람이 여성인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고, 이게 이 청원을 다루면서 n번방 사건이 거론된 거의 유일한 대목이었다는 사실은 이 사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런 어이없는 사태는 청와대 청원에 몇백만명이 참여하는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바로잡힐 모양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법 개정안을 제출하겠다고 했고 이인영 원내대표가 임기 내 처리를 약속했다. 정의당은 원포인트 국회와 앞서 국회 법사위에서 문제 발언을 한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해임을 요구했다. 과연 이런 약속과 제안이 현실이 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정치권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는 했다는 점은 다행인 것도 같다.

그런데 정치권의 이러한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동안 디지털성범죄에 관한 청원이 꾸준히 올라왔고 같은 문제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여러 차례 제기됐다는 점에서 정치인들이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을 새로 알게 된 덕분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보다는 이 문제가 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셈한 결과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 정치권에선 ‘이남자’ 담론이 유행했다. 20대 남성들을 정치세력이 충분히 대변하지 못해서 뭔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의 이면에는 강남역 살인사건과 불법 촬영물 문제 등 여성들의 주장이 문재인 정권에서 상대적으로 과대 대표되고 있다는 인식이 전제돼 있다.

과연 그게 사실인지는 일단 차치하고, 여기서 우리는 기성 정치가 유권자를 다루는 방식을 새삼스럽게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유권자를 남성, 여성, 20대, 3-40대로 나눈 후 이슈의 계층별 영향을 평가해 득표를 최대화 할 수 있는 전략을 찾겠다는 것이다. 가령 불법 웹사이트 차단 정책으로 얻을 수 있는 여성표가 이를 통해 잃을 수 있는 20대 남성표보다 많다는 보장이 없으면 굳이 입장표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n번방 사건에 대한 몇백만의 목소리는 같은 편에 서는 것만으로도 당연히 남는 장사(?)이다.

이런 세계관에서 생명력을 얻는 것은 사람이 아닌 오직 숫자이다. 추경 예산을 11조를 편성하든 50조를 편성하든 중요한 것은 이 돈이 정책의 사각지대에 있는 하위 계층으로 얼만큼 성공적으로 이전될 수 있느냐,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논의는 늘 숫자를 얼마나 늘릴 것이냐 또는 줄일 것이냐에만 집중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보다 숫자를 정치적 성과로 만들어 자랑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 돼버린 것 아니냐는 거다.

삶이 숫자로 둔갑한 정치는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는 꼼수를 쓰더라도 의석 수만 확보하면 된다는 비례정당들의 무규칙이종격투기 같은 정치와도 겹친다. 이런 정치에 과연 우리가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숫자가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중심인 정치가 절실하다.

김민하 / 저술가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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