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뤘을 당시, 많은 축구팬들은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며 '국민 영웅'으로 떠올렸습니다. 대회 3개월 전까지만 해도 확신이 없던 상황에서 차근차근 경기력을 끌어올리며 세계적인 강팀에도 주눅 들지 않는 팀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의 지도력만큼이나 대단했던 것은 바로 뒤에서 묵묵하게, 그리고 든든하게 지원했던 축구협회내 협력 체계였습니다. 비디오 분석, 체력 트레이너 같은 체계적인 준비, 훈련은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큰 영향을 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거미줄처럼 짜인 유기적이고 탄탄한 준비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큰 힘이 됐습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이용수 기술위원장이 진두지휘한 기술위원회가 있었습니다. 감독과 기술위원장의 유기적이고 원만한 관계, 그리고 협력 체계는 한일월드컵 성공의 원동력이 됐고, 모범 사례로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11년, 감독과 기술위원회 사이의 불편한 관계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 사이의 차출 문제로 비롯된 내부 갈등이 결국 폭발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넘어서고 만 것입니다. 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은 23일 오전, 축구회관에서 가진 평가전 선수 명단 발표에서 "감독 고유 영역을 침해함은 물론, 기술위원장이 명단을 함부로 팽개쳐버린 행위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행동"이라면서 이회택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에 정면으로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 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이 23일 오전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다음 달 열리는 세르비아, 가나와의 A매치에 출전할 국가대표 소집 명단을 발표했다. 이후 조 감독은 최근 선수 차출과 관련한 기술위원회와의 갈등과 관련해 준비한 원고를 읽으며 기술위에게 선수선발의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다 ⓒ연합뉴스
이에 대해 이 위원장은 "기술위에서는 대한축구협회 정관에 따라 감독, 선수 선발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서 "조 감독도 축구협회의 조직원으로서 조직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며 역시 정면 반박했습니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감독과 기술위원장 간의 갈등이 더욱 깊어지면서 과연 이제는 어느 수준에서 해결해야 할지 축구협회 뿐 아니라 축구계 전체적으로 깊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일각에서는 조광래 감독의 고집이 이런 일을 더욱 키운 것 아니냐는 말도 있습니다. 실제로 조 감독은 오는 9월 열리는 브라질월드컵 3차 예선을 앞두고 함께 호흡을 맞출 시간이 없기 때문에 다음 달 열리는 평가전에 베스트 멤버를 가동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구자철, 지동원, 홍정호, 김보경, 김영권 등 올림픽대표팀과 중복되는 선수들의 차출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과의 만남, 선수들의 개인 사정 등을 고려해 최대한 이를 존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로 인해 선수 선발, 차출에 대한 갈등이 봉합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술위원회는 각 급 대표팀의 원만한 선수 선발, 그리고 훈련 체계 정립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 이회택 기술위원장 ⓒ연합뉴스
하지만 기술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오히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며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감독이 선수 선발의 전권을 갖는다는 상식을 무너뜨리고 직접 선수 선발 최종 결정을 내리고 만 것입니다. 이 위원장은 평행선을 달리는 각 급 대표팀 선수 선발 문제에 더 이상 가만히 놔둘 수 없다면서 구자철, 김보경, 지동원을 올림픽대표팀에, 김영권, 홍정호, 윤빛가람은 성인대표팀에 각각 '배치, 선발'하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양측 간의 갈등이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해서 내린 결정이라고는 하지만 적극적인 중재 역할이 아닌 직접적으로 선수 선발을 한 이상한 결정에 많은 축구인들과 축구팬들은 의아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특히 선수 선발 갈등의 당사자인 감독 없이 기술위원들만 모여 '중재안'이 아닌 선수 선발 자체를 한 행위에 대해 조광래 감독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우리 축구 역사적으로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너무 한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급기야 선수 선발 명단을 제출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명단이 적힌 종이를 이 위원장이 내팽개쳤다는 조 감독의 주장까지 이어지면서 '월권'에 대한 분노를 털어 놓았습니다. 이어 조 감독은 직접적으로 의문점을 제시하면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업무인 대표선수 선발권에 대한 기술위원장과 대표팀 감독의 권한은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제시하라'고 했습니다. '항명'으로 볼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바로잡아야 하는 부분에 대해 조 감독이 직접 정면 돌파를 선언한 것입니다.

사실 이 같은 조 감독의 말은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일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위원장이 조 감독의 의견에 반박하면서 내놓은 대한축구협회 정관을 살펴보면 오히려 실제로 기술위원회가 '선수 선발'을 하는 규정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지 '검토 및 건의'라는 문구로 '의견 조율, 중재'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이 위원장이 지난해 7월 조광래 감독을 선임하는 자리에서 "기술위는 감독을 뽑을 권한만 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 선발은 전적으로 감독의 권한”이라고 말한 전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코칭스태프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이었는데요. 이는 이번에 이 위원장이 조 감독의 의견을 반박하면서 "선수를 선발할 수 있다"고 말한 것과 완전히 배치되고 뒤집은 말입니다. 조정, 중재 역할을 잘 해야 했을 뿐 이었는데 기술위원회의 심하게 오버한 행동 때문에 결과적으로 혼란을 초래하고, 조광래 감독이나 홍명보 올림픽팀 감독, 그리고 이에 해당된 선수들이 모두 직, 간접적인 피해를 본 셈이 됐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상황까지 가게 된 선수 선발 갈등은 아주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경기를 직접 뛰는 선수들이며, 이를 짜증나게 지켜봐야 하는 팬들입니다.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는 지금부터라도 보다 열린 자세로 대화하고 타협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 축구협회 정관에 나와있는 기술위원회의 기능. 건의는 할 수 있지만 그 어디에도 선발권이 있다는 내용은 없다.
하지만 내부적인 상황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결과적으로는 조 감독의 책임, 문제보다는 기술위원회, 그리고 이회택 기술위원장의 이해할 수 없는 뒤집기가 더 큰 요인인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조 감독의 공개 질의에 대해서도 "감독도 조직의 일부니 조직 논리에 따라야 한다"는 말로 반박한 이 위원장의 말을 보면 마치 감독 위에 기술위원장이 군림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부분으로서 논란을 일으킬 만한 소지가 있습니다. 사실상 조 감독이 자신의 말을 따라야 한다면서 앞으로도 계속 평행선을 이어가겠다는 것으로 풀이해볼 수도 있습니다.

합리적인 중재, 조율이 아닌 갈등을 오히려 부추기는 발언, 행동으로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기술위원회, 이회택 기술위원장은 자신들의 역할에 좀 더 충실히 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정관에 나와 있듯이 기술위원회가 선수 선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인 대표팀 운용을 위해 장기적으로 어떻게 발전시켜나갈지에 대한 명확한 플랜을 제대로 짜고, 원만한 선수 차출 문제 해결 방안을 연구하고 힘쓰는 일에 더 신경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갈등을 부추기고 논란을 더 키우는 집단, 권력이 아니라 좀 더 열린 자세로 진짜 한국 축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집단으로써 인정받는 기술위원회, 그리고 감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현명하고 합리적인 판단력을 가진 기술위원장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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