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비안의 해적 4>에 관한 소식을 전하면서 몇 차례 말했었죠? 저는 세 편으로 구성된 이전의 시리즈를 재미있게 본 적이 없습니다. 단 한 편도 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은 데는 그만한 요인이 있을 텐데, 도통 그게 무언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여자분들이라면 조니 뎁의 매력에 푹 빠졌겠거니 하는 추측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편을 꾸역꾸역 모두 관람했습니다. 게다가 어제 갓 개봉한 <캐리비안의 해적 4>도 냅다 달려가서 봤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다음과 같이 묻더군요. "재미없다면서 왜 자꾸 보는 거야?"

뭐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조니 뎁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키이라 나이틀리에 대한 관심도 일절 없습니다. 단지 언제나처럼 한번 보기 시작했으니 끝장을 보자는 오기가 발동한 거죠. <쏘우>도 그랬고 <해리 포터>도 그랬습니다. 이 밖에도 몇 편이 더 있지만 <해리 포터>의 경우엔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흥미를 돋우었습니다. 급기야 <죽음의 성물 2>는 개봉일을 기다리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이런 경험에 의해 <캐리비안의 해적 4>에도 한 가지 희망을 걸었습니다. 세 편으로 종지부를 찍는 듯하다가 되돌아온 만큼, 혹시 <해리 포터>처럼 전에 없던 재미를 새롭게 던져주진 않을까 하는...

제 기대를 저버리고 <캐리비안의 해적 4>는 여전하더군요. 이 말은 보는 관점에 따라 혹평이 될 수도 있고 호평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저는 전자의 의미에 가깝게 사용했습니다. <캐리비안의 해적 4>를 통해 다시 한번 이 시리즈는 저와 궁합이 맞지 않음을 여실히 깨달았습니다. 요모조모 뜯어봐도 영화 자체가 졸작 수준은 결코 아닙니다. 단점이야 꼽을 수 있겠지만 그토록 흥미를 느끼지 못할 만큼의 부실한 영화가 아님을 머리로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못하네요. 따라서 이건 어느 때보다도 더 주관적인 감상임을 미리 밝혀두는 바입니다.

일찌감치 알려진 것처럼 <캐리비안의 해적 4>에는 전작의 올란드 블룸과 키이라 나이틀리가 출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만큼은 조니 뎁의 비중이 커졌을 것이라고 예측했다가는 큰 코가 즈려 밟히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여기서 첫 번째 '여전히'가 나옵니다. 이전의 시리즈에서 사실상 잭 스패로우는 주인공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이건 다들 공감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대신에 윌 및 엘리자베스와 균등하게 비중을 나누거나 혹은 두 캐릭터의 옆에서 영화가 돋보이도록 해주는 양념의 역할이었습니다. 다만 조연이라기엔 캡사이신의 함유량이 아주 높은 강한 양념이었죠.

<캐리비안의 해적 4>에서도 잭 스패로우는 여전합니다. 역할이나 비중 모두에서 말입니다. 그는 변함없이 시시껄렁하고 유쾌하며 요란한 캐릭터입니다. 물론 <캐리비안의 해적 4>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이고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이도 여전히 잭 스패로우입니다. 동시에 그는 여전히 조연과 주연 사이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남은 빈자리는 페넬로페 크루즈와 이안 맥쉐인이 채우고 있죠. 두 사람은 각각 잭 스패로우의 연인이었던 안젤리카와 그녀의 아버지인 '검은 수염'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들의 캐스팅은 적절한 판단으로 보입니다. 연기도 꽤 훌륭했고요.

문제는, <캐리비안의 해적 4>에서 새로 영입한 안젤리카와 검은 수염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이질 못합니다. 안젤리카와 잭 스패로우의 티격태격하는 관계는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만을 떠올리게 할 뿐입니다. 검은 수염 또한 근엄할지언정 사악하고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악역 캐릭터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울러 전작에서 윌과 엘리자베스는 연인관계로 극을 이끌고 갔던 데 반해, 안젤리카와 검은 수염의 부녀관계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롭 마샬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 액션보다는 이런 드라마적인 요소였을 것임을 감안하면 굉장히 실망스럽습니다.

<캐리비안의 해적 4>의 두 번째 '여전히'는 액션입니다. 오프닝에서 잭 스패로우의 등장 이후 펼쳐지는 그것은 의외로(?) 여전히 시끌벅적하고 현란합니다. 액션 시퀀스의 구성에 정확히 누구의 공이 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롭 마샬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완성도를 보며 살짝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의 '여전히'는 딱 여기까지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캐리비안의 해적 4>의 감독으로 롭 마샬이 선임됐다는 것을 들었을 때 의외라는 반응과 함께 우려를 표했습니다. 수많은 상을 휩쓴 그의 경력은 잘 알지만 액션이 필수인 영화에서는 과연 어떨지 미지수니까요. 결과적으로 롭 마샬을 <캐리비안의 해적 4>의 감독으로 내세운 건 디즈니의 오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잭 스패로우의 특성에 걸맞게 액션 시퀀스를 차린 건 좋았습니다만 박력은 고어 버번스키의 그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나마 한스 짐머의 음악이 뒤를 받쳐줬길래 망정이지 하마터면 솜방망이와도 같은 액션에 그칠 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마저 살리지 못한 <캐리비안의 해적 4>의 이야기는 산만하기만 하니, 롭 마샬은 자신의 전공을 발휘할 공간이 없는 영화를 택한 것에 다름 아니게 됐습니다. 차라리 뮤지컬 버전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전작에 이어 <캐리비안의 해적 4>의 각본을 쓴 테드 엘리엇과 테리 로시오에게도 평균점 이하를 주고 싶습니다. 감독이 바뀔 것을 미리 인지했던 탓인지 <캐리비안의 해적 4>의 이야기는 전에 없이 허망합니다. 캐릭터부터가 매력이 떨어져 관객으로서는 흥미를 잃어 두 시간 동안 영화에 집중할 확률이 높지 않습니다. 잭 스패로우, 안젤리카, 검은 수염 사이의 관계도 신통치 않아 젊음의 샘을 찾아 나서는 잭 스패로우의 동기부여도 부실하기만 합니다. 인어를 배치한 것만은 칭찬하고 싶었으나, 이마저도 결국 어설프고 얕은 로맨스로 이어지면서 구색맞추기로 전락했습니다.

디즈니의 가장 큰 오판은 굳이 <캐리비안의 해적 4>를 3D로 만들었어야 했냐는 것입니다. 아니, 대세를 따라 3D로 제작한 것은 일면 이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특유의 액션을 대거 삭제시켰다면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당황스럽게도 <캐리비안의 해적 4>에서 배나 바다는 더 이상 잭 스패로우의 활동영역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함선 대 함선의 대결은 일체 등장하지 않고, 심지어 선상에서의 액션도 거의 없습니다. 명색이 해적이 등장하는데 <캐리비안의 해적 4>는 해양 어드벤처가 아니라 오지나 육지 어드벤처로 탈바꿈하고 말았습니다. 이건 숫제 <인디아나 존스>를 연상시키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배경을 추측해보면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첫째로 감독이 롭 마샬로 바뀌었다는 것을 감안한 전략, 둘째는 3D로 제작하면서 발생하게 되는 막대한 비용을 다른 데서 가져와 돌려막은 얄팍한 수작.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저는 후자에 한 표 던지겠습니다. 그러니까 해양에서의 분량을 줄이면서 예산을 절약하는 거죠. 변환도 아니고 직접 3D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니 제작사로서는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덕분에 <캐리비안의 해적 4>는 시리즈의 정체성을 상실한 꼴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캐리비안의 해적 4>에는 마지막 하나의 '여전히'가 남았습니다. 바로 잭 스패로우. 조니 뎁의 고군분투만큼은 빛을 발하고 있었으니 아직까지는 약발이 먹힐 것으로 보입니다. 관객의 관심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5편마저 지금과 같이 만든다면 시리즈의 패망이 멀지 않을 겁니다. 과연 어떨지 지켜보기 위해서 5편도 관람해야겠군요.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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