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일의 여행에서 천신만고 끝에 눈물 세 방울을 얻어 소생했으나 신지현에게 남은 삶은 고작 6일. 타고난 수명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49일의 사투를 벌인 신지현의 입장에서는 보통 사람이 말기암 선고를 받은 것보다 더 청천벽력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절망도 이런 절망이 없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결말에 초점을 맞추면 절망이겠지만 죽기 전 마지막 한 달 보름을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본래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진실과 거짓을 모두 알고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은 누구도 얻을 수 없는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남아 있는 5일 중 이틀이 참 절묘하다. 이 작가의 상상력에 박수를 쳐주고 싶은 구성이었다. 하루는 신지현이 한강을 남자친구로 빌리고, 또 하루는 한강이 신지현을 여자친구로 빌린 이틀. 서로의 마음을 숨겨야 하지만 그 외면 속에 눈물보다 더 슬픈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마음과 기억을 상대에게 감춰야 하는 두 사람의 사랑은 이 드라마의 끝을 동화로 끝맺음하게 했다.
“너무 사랑하면 어떤 오해를 받아도 말 못할 게 있는 거야. 너무 사랑하면 그런 건가봐. 오해받아도 변명하지 않고, 그 사람이 상처받는 것보다 내가 오해받는 게 더 나은 거야”
이 드라마의 주제는 위의 두 대사에 담겨 있었다. 49일 여행 동안 신지현이 누구에게도 스스로를 밝힐 수 없었던 것처럼 신지현과 한강은 마지막까지도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 모르는 척을 한다. 짝사랑이 괴로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서로 이미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만 끝까지 그 마음을 감춰야 하는 두 사람의 마지막 소풍은 마치 천상병의 시 ‘귀천’을 떠오르게 한다.
|
모든 사람에게 허용되지 않은 죽음 저편의 기억을 신지현에게 허용한 것은 지나친 작가의 전지적 개입인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살렸다면 신지현은 49일 동안 알게 됐던 진짜 소중한 사랑인 한강의 마음을 모를 수밖에 없으니 그것 역시도 잔인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작가의 선택은 진실한 사랑에 대한 기억이 삶보다 소중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이 작가의 멋 부리기에 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통속이란 말은 욕이 아니라 칭찬으로 들릴 정도로 막장이 판치는 한국 드라마들 속에서 49일은 꽤나 다른 모습을 보였고, 대박은 아니어도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마지막에 송이경이 어릴 적 잃어버린 신지현의 친언니였다는 것이 실망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이 드라마는 요즘 한국 드라마의 공식을 거부한 나름의 독주를 해왔다는 점에서 결말의 멋 내기를 이해해주고도 싶다. 49일을 보면서 한국 드라마에서도 러브레터나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