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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무너뜨린 원칙들[기고]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 승인 2020.03.03 08:09

[미디어스=강남규] 원칙들이 무너지고 있다. 전염병 재난이 만든 한 풍경이다. 한국 사회가 긴 세월 쌓아오며 합의한 원칙들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반대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무참한 비난의 화살이 돌아온다. 재난이 가진 파괴력이다.

이번에도 첫 번째로, 또 가장 처참하게 무너진 것은 언론 보도의 원칙이다. 언제고 무너지지 않은 적이 없으니 어쩌면 ‘무너졌다’는 표현이 부적절할지 모르겠다. 한국기자협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재난보도준칙을 만들어 제정한 바 있다. 정확한 보도, 단편적 정보의 보도 자제, 선정적 보도의 지양 등 독자와 시청자들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원칙들이지만, 많은 언론들이 손쉽게 원칙 무너뜨리기를 택했다.

SBS, 한국일보, 머니투데이 보도 화면 (사진=네이버 뉴스화면 캡쳐)

코로나19 사태에서 눈에 띄게 무너진 원칙이 있다면 ‘단편적 정보의 보도’다. 코로나19가 신종 바이러스인 까닭에 전 세계 학계에서는 빠르게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속도가 중요한 국면인 만큼, 어떤 연구들은 충분한 검토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발표되기도 한다. ‘실험실 유출설’을 제기한 중국 논문이 대표적인 예다. 전문가들의 검토 결과에 따르면 해당 논문은 과학적 근거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일부 외신은 이 논문을 거침없이 인용 보도했으며, 한국 언론은 외신을 재인용해 ‘실험실 유출설’을 무분별하게 보도했다.

외신 보도 중 일부분만 취사선택하는 ‘왜곡 인용보도’도 횡행한다. 외신 기사의 전체 맥락과 반대되는, 위험하고 선정적으로 보이는 한두 구절만 가져와 왜곡 인용하는 식이다. 함께 힘을 모아 해결을 도모해도 부족할 상황에, 재난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거나 ‘단독 보도’로 트래픽을 챙기려는 원칙 없는 보도의 전형들이다. 

개인정보가 보호받아야 한다는 원칙도 무너지고 있다. <서울경제>는 2월 28일자 기사에서 일부 기업들이 사업장 내 감염을 막겠다는 취지로 직원들의 연말정산 자료를 열람하여 신천지 신도 의심 여부를 판단한 후 개별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는 연말정산 목적으로만 활용해야 하는 자료를 다른 용도로 활용한 것으로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의 혐의가 있다. 또한 위법 여부를 떠나 ‘개인정보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확고하게 합의된 원칙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재난은 그 원칙을 무너뜨렸다.

단지 일부 기업에서 발생한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네이버·다음 양대 포털에 달린 도합 4천여 개의 댓글들은 이것이 단지 일부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기업들이 일 잘하는 것”(네이버)이라거나 “필요하면 뒤져야지, 뭔 개인정보 타령”(다음)이냐는 반응은 원칙을 포기하는 일이 단지 코로나19 사태에 직면해서만 특별하고 예외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일으킨다.

서울경제 2월 28일 자 보도

정부가 스스로 세운 원칙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민생 피해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2월 13일 문재인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경제계 주요 인사들과의 간담회’를 열어 재계 총수들을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윤여철 현대자동차 부회장 등 주요 재계 총수들이 참석해 16개의 건의사항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재계의 지속적인 희망사항이었던 탄력근로제 입법과 화학물질 관련 규제 완화, 그리고 저녁 회식 활성화 등을 요구했는데, 청와대는 6일 뒤인 19일 브리핑에서 “간담회에서 제시된 경제계의 총 16개 모든 건의사항을 수용, 신속히 후속조치를 이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코로나 19 대응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이와 같은 요구사항들은 2019년 11월 재계 단체들이 발표한 성명에도 이미 포함돼 있던 내용들이다. 당시에 문재인 대통령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하여 재차 요구된 사항들에 대해 정부는 ‘모든 건의사항을 수용’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노동존중사회’와 ‘사회적 대화’라는 문재인 정부의 두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린 셈이다.

물론 원칙이라는 것이 어떤 상황이건 항상 지켜져야만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재난과 같은 비상 상황이라면 필요 시 원칙을 유연하게 잠시 무너뜨릴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원칙은 있어야 한다. ‘원칙을 무너뜨리는 원칙’이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원칙을 지키고 무너뜨릴지에 대한 합의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을 무너뜨리는 원칙’이 중요한 이유는 원칙이 갖는 특성 때문이다. 원칙은 행위자들로 하여금 실수를 피하게 하는 장치다. 보도준칙, 윤리강령과 같은 언론 보도의 원칙들은 현장 기자들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최저선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함으로써 실수를 피하게 돕는다.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은 무수하게 다양한 실무적 상황에서 실무자에게 분명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판단을 돕는다. ‘원칙을 무너뜨리는 원칙’ 없이 원칙을 무너뜨리면 그 틈에는 실수와 판단 착오들이 싹트게 된다.

재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원칙을 세우게 한다. 원칙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게 하기도 하며, 원칙 자체를 시험대에 올리게 하기도 한다. 한 치 앞을 전망하기 어려운 시기다. 하지만 재난을 맞닥뜨려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우리는 그것들을 잘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운영위원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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