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세대가 다른 세대와 결별하는 지점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내게 흥미로운 것은 어떤 ‘패턴(pattern)’들이다. 그리고 특히 그 중에서도 ‘소비’ 패턴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삼시세끼를 ‘꼬옥~’ 먹어야 하거나 적어도 속이 궁진할 때는 반드시 뜨신 밥을 먹어야 하나? 대답이 (도시에 사는 것을 전제로) 예스에 가깝다면 당신의 동시대적 연령이 빠른 노화를 겪고 있는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삼시세끼를 먹는 풍습은 농경사회의 미덕이며, 밥은 지나치게 영향 불균형적인 식품이다. 수 년 전에 별다방, 콩다방 커피 값이 설렁탕 한 그릇 값이 넘고, 분유값을 위협하니 세상이 말세가 아니겠냐는 고리타분한 소리가 있었다. 지금은, 아시다시피 문화적 삶이라는게 에소프레스를 모르면 원시인, 아라비카(arabica) - 혹시나 모르실 분들을 위하여, 아라비카는 에디오피아가 원산지인 커피나무의 품종이다. 최근, 봉지커피의 대명사 맥심에서도 인스턴트 아라비카 커피를 출시했다. - 정도는 알아야 교양인이다. 하루에 ‘아메리카노’ 한 잔은 마셔야 소화 혹은 각성이 된다는 사람이 수두룩 빽빽하다.

▲ MBC <불만제로> ⓒMBC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 고리타분한 한탄일랑 저리 치우시라. 이것이야말로 극복되지 않는 본능적 소비, 소비의 일상성이다. 결의에 찬 집회를 마치고 차갑게 얼어버린 속을 달래고자 해장국 한 그릇 먹고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광화문 앞에서 질서 있게 신호를 기다리고 막차를 염원하게 되는 것이 서울이다. 이름하야 바로 현대세계의 일상성이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공산당에 가입하여 죽을 때까지 공산당원으로 살아갔던 프랑스의 이론가 앙리 르페브르가 입증했던, 현대인들이 가장 지겨워하면서도 끝내 놓칠까봐 전전긍긍해하는 마지막 보루가 바로 일상성이고 소비이다.

그렇다. 나는 소비자이다. 운동을 하고 나름대로 고상하게 산다고 자위해도 애써 모르는 척 할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FTA 반대 투쟁을 할 때 장충동에서 보게 된 '한미FTA 소비자대책위' 기자회견이 떠오른다. 그 때 구호가 내 입장에서는 굉장히 낯설던 것이었는데, 그 구호는 “소비자 후생 파괴하는 한미FTA 반대한다!”였다. 아니,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추운데 떨고 있건만 왠 소비자란 말인가. 게다가 소비자 후생이라니....후생이 뭐야? 맞다. 솔직히, 고백한다. 그땐, 지금보다 곱절은 무식했다.

알고 보니, ‘후생(厚生)’은 정말 좋은 말이었다. 사전적 의미로 사람들의 생활을 넉넉하고 윤택하게 하는 일, 건강을 유지하거나 좋게 하는 일이다. 이런 좋은 말을 몰랐던 것이다. 누군가 말했었다. 좋은 운동은 상식이고, 최고의 운동은 먹고 살만한 것이라고. 내가 하는 ‘후생’이 나의 최고의 운동이다.

그리고 잊었었다. 활동가로 산다는 것이 소소한 감동들에 오랫동안 연민을 품도록 한가하지가 않다. 그런데 백수가 되고 나서 직업란 기입이 막막해지면서 왠지 뭉클한 울분이 목구멍에 차오를 때 문뜩 생각났다. ‘직업을 뭐라고 적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학생이라고 할까, 아님 간간히 글을 쓰니 칼럼니스트... 근데 대학원생이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어디에 글을 쓰시냐고 하면 또 어쩌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더니 하지 않아도 될 ‘쫄탱’의 마음들에 순간순간 당혹스럽다. 그런데 퍼뜩 발끈하는 마음과 ‘소비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나의 직업은 ‘소.비.자’이다.

소비를 떼고 도저히 살 수가 없다. 한 달에 얼마를 벌든 소비는 숙명이다. 그런데 그 소비의 욕망이란게 무엇이냐. 소비의 욕망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것은 철저히 세대의 리딩 그룹을 따라 가는 것이다.(그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광고’이다.) 우석훈의 분석처럼 20대 후반인 나는 어느새 아무런 비판 없이 돈 잘 버는 30대 초반을 동경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벤처 하는 욘니, 옵하들이 좋아한다는 ‘와인’이 괜히 마시고 싶고, 동태/생태/명태 구분도 못하면서 5급 사무관 정도 되는 횽아들이 잘 간다는 광화문 뒤 생태집이 맛있게 느껴진다. 아하! 생각만 해도 근사하여라~ 가랑이 찢어지는 모방이어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격투기에 참여하는 맷집이어라!

▲ ⓒMBC
그런 내게, 소비 사회 강호의 질서인 ‘협(俠)’을 순식간에 일깨워준 절학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만나면 좋은 친구’의 교양 프로(예능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불만제로>였다. 기분좋은 발견이었다. 그 동안 미디어가 ‘소비자’를 불러 세우는 방식은 딱 두 가지였다. 상품에 기생하는 광고를 통해 ‘네가 방에 누워 미디어를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건, 상품을 소비하기 때문이지’를 각인시키거나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소비자보호원을 근엄하게 호명하며 당연한 사후약방문을 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반성해보자, 미디어가 틈만 나면 시청자/독자 권리를 그렇게 팔아먹었으면서, 시청자/독자보다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소비자들의 권리에 얼마나 관심을 가져왔는가 말이다. 나아가 사회 운동까지를 포함해서 최근까지도 자본에 의한 언론(등등의) 자유와 독립을 부르짖으며 민주주의 어쩌구 하면서도 진정 오늘날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서 소비자(시청자/독자)에게 무엇을 말해 왔는지 자문/자답해 보잔 말이다.

반성한다. 나부터도 어느덧 소비로 계량(計量) 가능한 것만이 행복이 되어버렸다는 수사적인 냉소를 많이 쏟아냈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떠들었던 행복의 주문은 결국,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자본 민주주의 희망고문을 멈추지 못했었고, 대한민국 1%가 되라는 계급 민주주의의 주술을 부수지 못하는 관념적 행복, 기계적 평등의 행복이었다.

그래서 거창하게, 소비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더러운 숙명을 타고난 나의 일상적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바로, <불만제로>에 있었다. ‘알마니한’ 시계를 차고 ‘렉섹쉬’한 차에서 내리면 얼마나 폼 날까 싶었을 때, <불만제로>는 명품 A/S의 후진성에서 에쿠스의 기만까지 질주했다. 기분도 별론데 찜질방 갔다 파마나 할까 한 날에는 닥터피쉬와 파마의 진실로 하강했다. 외국으로 이민 간 친구가 애기 돌잔치 호텔에서 한다고 자랑했던 날, 1000원 짜리 김밥 먹으며 3만원도 아까운데 먹고 살만한 것들이 더한다고 거품을 물었는데 기묘하게도 찐쌀과 아동복의 문제로 점프했다. 비데와 보석을 엮는 신묘함은 또 어떠한가. 하루 12시간 이상 TV보는 헤비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 소파에 앉아 감자칩을 먹으며 TV만 보는 사람)는 <불만제로>에 정말 감격하고 있다.

받아들여야 하는 서글픔이 점점 많아진다. 무뎌지거나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소비의 욕망때문이다. 날로 새로워지는 소비 강권의 사회에 적응력이 점점 좋아지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심하게 긍정적인 착각일 뿐이었다. 특히, 서울에선 위안될 게 별로 없다. 누구도 나의 후생(1.사람들의 생활을 넉넉하고 윤택하게 하는 일. 2 건강을 유지하거나 좋게 하는 일)에 신경 써 줄 틈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바로 그 틈을 누군가가 바로 미디어가 메워야 하지 않겠나? '웰빙'하시라는 겉 멋든 충고는 정보도 아니고 교양도 아니다. 난 차라리 웃음 주며 소비의 양면적 본성에 접근하는 <불만제로>가 좋다.

학교라고 믿었던 사회운동을 휴학하고 몸을 더듬어보니 라이타 한 개밖에 없더라는 싸구려 열정에 여전히 감격하는 청년 백수. 을용타에 열광하는 청년 백수들이여,라이타(right-打)하라! 오른쪽을 때려라!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