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월 1일, KBS 전체 사원의 뜻을 모아 제정된 'KBS 방송 강령'이란 것이 있다. 방송강령의 제정 취지는 "자유언론의 실천자로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진실과 정직 그리고 균형을 바탕으로 한 공정방송을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자기 다짐이었다.

지금의 KBS 구성원들이 얼마나 이 방송 강령을 인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송강령의 내용 중에 제 8항의 이렇다. "공공의 문제에 관한 논평이나 해설은 정확한 분석, 평가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의견이 찬반으로 갈라져 있는 쟁점에 관해서는 쌍방의 의견을 대표하는 논평이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내친김에 9항까지 살펴보자. 9항은 "정부나 공공기관, 사회단체, 기업 등이 제공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진실여부를 가리도록 노력하며 그러한 기관의 일방적인 선전에 이용되지 않는다."

다른 기준은 제쳐두고, KBS 내부 구성원들이 스스로에게 한 약속인 '방송강령'에 입각해 KBS 보도를 살펴보면 어떨까? 어제, 오늘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과학벨트 논란을 KBS 방송 강령의 기준으로 짚어보자.

▲ KBS는 14일 뉴스에서 과학벨트 입지가 대전 대덕으로 결정됐다고 처음 보도했다. 정부 공식 발표 이틀 전의 일이었다.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기 이틀 전이었던 지난 14일 KBS는 과학벨트가 대전 대덕단지로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14일 KBS는 관련 보도를 헤드라인으로 3꼭지 편성했다. 각각 꼭지의 제목들은 "과학벨트 대전 대덕 결정", "후폭풍…충청권마저", "당혹·혼선…왜?"였다. 보도의 구성은 스트레이트, 지역 반응 스케치, 분석의 순이었다. 과학벨트가 공공의 문제라는 점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KBS는 정확한 분석과 평가에 바탕을 두며 쌍방의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정부 기관의 일방적 선전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다.

14일자 KBS 보도는 비교적 방송 강령의 원칙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물론, 과학벨트의 입지로 대전 대덕이 결정된 근거에 대해 정확한 분석을 하진 않았지만 지역 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쪽의 편에 치우치지 않고 쌍방의 의견을 두루 전했다. 정부의 선전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단 기준에서 볼 때도, 과기부가 혼란에 빠진 모습을 비판적 뉘앙스로 보도했다.

▲ 15일 과학벡트 입지 결정에 대한 후속보도에서 KBS는 정부 결정의 타당성 여부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평가보다는 지역의 반발을 이기주의 문제로 몰고가기 시작했다.
이어 15일자 보도를 살펴보자. KBS는 15일 과학벨트 논란을 "입장 따라 거센 반발", "극한 대결 정부 고심"의 2꼭지로 나눠 전했다. 15일에 이르러 KBS 보도는 '정확한 분석과 평가'의 프레임은 사라지고 오로지 '쌍방의 의견'과 '정부의 선전'으로 넘어갔다. 예컨대, 정확한 분석과 평가를 위해서는 과학벨트를 대전 대덕에 두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입지 결정에 정치적 고려가 없었는지에 관한 언론적 감시가 요구된다. 참고로, 비판적 검토와 감시는 2003년 제정된 KBS 윤리강령의 핵심적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KBS는 과학벨트 입지 결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감시를 건너 뛴 채, 문제를 '지역 이기주의'로 몰고 갔다. 급기야 15일자 "극한 대결 정부 고심" 리포트의 결론은 "지역 이기주의를 좇아 양보 없는 극한 대립으로 치달으면서 현 정부의 국정 장악력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로 맺어졌다. 정부의 결정이 타당했는가의 여부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정부 결정이 관철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

▲ 14일 까지만 하더라도 과학벨트 입지가 후보지조차 압축되지 않았다던 정부는 이틀 만에 과학벨트 입지를 발표했다. 16일자 KBS 보도는 이에 대한 일말의 비판을 않은 채, 정부의 발표를 거의 그대로 옮기는 선전에 이용되는 모습이었다.
KBS의 이러한 보도 태도는 16일자 보도에 이르러, 심화 확대되었다. 16일자 KBS 뉴스는 과학벨트 입지 선정을 헤드라인으로 3꼭지에 걸쳐 보도했다. 각각의 꼭지 제목은 "'대전 대덕 확정'…인프라·접근성 탁월", "15개 연구단 조성", "백지화 요구"의 순이었다. 15일자 보도와 마찬가지로 보도의 요소에 '정확한 분석과 평가'는 없었고 다만, '정부의 선전'과 '쌍방의 의견'만 남았다.

16일자 KBS 보도는 정부의 선전을 그대로 옮기며 '일방적인 선전에 이용되는 모습'을 보였다. 과학벨트가 대전 대덕에 설립되는 것에 대해 '짜고 친 고스톱'이었단 평가가 우세하고, 이는 14일자 KBS 뉴스가 인터뷰 한 김승환 포스텍 교수 역시 지적했던 부분이다. ("기초과학계에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프로젝트라고 하는 큰 프로젝트인데, 과학이 좀 빠진 상태로 지역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이 됩니다.") 하지만 KBS는 정부가 입지를 발표하자 이러한 부분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불과, 이틀 전 KBS와의 인터뷰에서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며 '후보지를 5곳으로 압축하는 작업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던 정부였는데, 단 이틀 만에 일사천리로 입지 결과를 발표한 것 역시 문제 삼지 않았다.

KBS의 정부 선전은 이어졌다. KBS는 "15개 연구단 조성" 리포트를 통해, "과학벨트는 대전을 중심으로 영. 호남을 연결하는 삼각 벨트 형태"라며 "대구, 울산, 포항 등 영남에 10개 연구단이, 광주에 5개 연구단이 조성, 예산도 각각 1조 5천억 원과 6천억 원이 파격적으로 지원 된다"고 강조했다. "지역 민심을 달래기 위한 정치적 배려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KBS 스스로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한 이러한 결정이 이번 결정의 본질을 흐리기 위한 정부의 선전임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KBS는 과학벨트 입지 논란을 '지역 이기주의'와 '지역의 과열 유치 경쟁'으로 몰고 갔고, 그렇게 정리했다. 이것이 얼마나 맹탕의 보도인지는 오늘 자 조중동만 펼쳐 봐도 알 수 있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8할의 책임은 정부에게 있는데, 공영방송 KBS는 8할의 문제는 놔둔 채, 나머지 2할의 문제에만 카메라를 들이댄 꼴을 보였다.

정부에 대한 비판적 감시 기능을 수행함에 있어 KBS가 조중동만 못하다는 평가가 나온 지도 꽤 되었다. 국민의 재원인 공영방송이 사주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출렁이는 매체보다 덜 공정하고, 회사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언제든지 사안을 곡해할 수 있는 매체보다도 건전한 여론 형성에 기여하지 못하는 점을 어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최소한의 사회적 상식조차 지켜지지 않은 채, 표류한지도 꽤 된 KBS에게 직업적 전문성과 특수성을 감안해 스스로 만들어낸 룰을 기억하고 또 지키라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기대인 것일까?

KBS 방송강령은 총강에서 독립을 따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내부와 외부로부터 부당한 간섭이나 압력을 배제하며, 국민의 방송으로서 전통과 권위를 수호한다." 과학벨트 논란에 대한 KBS의 보도는 정말 공정하고, 정확하며, 객관적으로 제작되었을까? 이 땅의 방송을 대표하기엔 KBS의 보도는 너무 추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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