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즉위식은 생각보다 조촐했다. 마치 정조대왕의 죽음이 '암살설'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끊임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임금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비록 조촐하게 처리되긴 했지만 그래도 감동적이었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에도 정적(政敵)의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세손의 즉위식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정조대왕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MBC 창사 46주년 기념드라마 <이산>(김이영 극본, 이병훈 연출)은 이렇게 '영조' 시대를 마감했다. 이제 정조대왕이 어떻게 개혁 정치를 펼치는지 지켜보는 것만 남았다. 그런데 정조대왕의 속 시원한 개혁 정치를 드라마 <이산>에서는 제대로 보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서바이벌 게임의 주체가 세손에서 임금으로 신분만 바뀌는 것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 MBC '이산' ⓒMBC
개혁 군주 정조대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겠다는 기획 의도와 달리 드라마 <이산>은 세손을 음해하려는 노론 벽파의 음모론에 집중하는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폐위와 죽음을 획책한 노론 벽파가 미래의 정적(政敵)이 될 세손을 폐위시키고 암살하기 위해 전방위 공세를 펼치는 과정과 그것에 맞서는 세손 이산의 고군분투가 지금까지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라는 정글의 법칙을 적용한다면, 조선 궁궐을 장악한 노론 세력의 거대한 음모론과 맞서 싸우며 살아남아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세손 '이산(이서진 분)'은 분명 강한 자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런가? 만약 드라마 <이산>의 세손에게 도화서 다모 '성송연(한지민 분)'과 세자익위사 관원 '박대수(이종수 분)', 그리고 '홍국영(한상진 분)'이 없었다면 상황은 어찌 되었을까?

드라마 <이산>의 주인공 '이산'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은 '영조(이순재 분)' 이후의 권력을 장악하려는 노론 벽파 세력이다. '정순왕후(김여진 분)'와 '정후겸(조연우 분)'은 노론 벽파의 핵심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이 꾸미는 음모에 걸려든 세손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은 언제나 성송연과 박대수, 홍국영이다. 일편단심 세손 저하를 바라보는 성송연의 '재치'와 세손 저하의 일이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박대수의 '뚝심', 그리고 개혁 정치를 표방하며 노론 벽파와 맞서는 홍국영의 '두뇌'가 환상의 삼각 구도를 형성하면서 세손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것이다. 그 결과 세손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처럼 드라마 <이산>은 음모론을 둘러싼 치열한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드라마에서 '음모론'은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리면서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음모론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구성한다면 극적 긴장감은커녕 오히려 음모론 자체가 짜증스러워질 수 있다. 게다가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창작된 역사드라마에서의 음모론은 시청자의 역사의식을 왜곡시키면서 정치 혐오증을 유발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보다 더 주의해서 사용해야 한다.

드라마 <이산>의 주요 내용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음모론에 의지하여 전개되는 것은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정조대왕의 즉위식을 다룬 44회와 45회는 이 같은 문제를 잘 보여준다. 노론 벽파의 두뇌 역할을 하는 정후겸이 즉위식이 진행되기 전에 세손을 시해하기 위해 모집한 '살수(이정용 분)'가 대전의 단청을 새로 단장하는 일꾼으로 위장해 궁궐에 잠입하는 상황은 극적 긴장감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세손 이산이 시해에 사용할 무기를 숨기고 빠져나가는 살수를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자애롭게' 놓아주는 이 같은 상황은 세손 이산의 인간적인 면모보다 평생을 암살의 위협 속에 살아왔으면서도 그 같은 문제에 둔감한 어리석은 모습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음모론을 기능적으로 이용하는 과정에서 세손 이산의 캐릭터에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홍국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위식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불길한 상황을 염려한 홍국영은 세손에게 즉위식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청한다. 하지만 세손은 증거도 없이 그런 걱정을 하는 것은 즉위식을 앞두고 지나치게 긴장했기 때문이라며 홍국영의 주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한시도 단 하루도 비울 수 없는 것이 보위"이기 때문에 즉위식 연기는 불가하다는 세손의 말에 홍국영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바로 다음 장면에서 홍국영은 아무래도 노론 벽파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박대수의 이야기를 농담으로 흘려듣는다.

▲ MBC '이산' ⓒMBC
물론 홍국영은 바로 익위사 관원을 주막으로 보내는 조치를 취하긴 하지만, 박대수의 이야기를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장면 구성은 음모론을 강화하기 위한 억지스런 상황일 뿐 아니라 홍국영의 캐릭터에 균열을 일으킬 뿐이다. 이 같은 극적 상황으로 인해 명석한 두뇌를 가진 지략가 홍국영이란 인물의 '성격(character)'은 사라지고 '역할(role)'만 남게 된 것이다. 박대수가 노론 벽파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성송연이 대전 단청을 개칠하는 일꾼으로 위장한 '살수'의 동태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모두 '성격'보다는 음모론으로부터 세손 저하를 지키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음모론의 부작용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등장인물인 성송연과 박대수를 평면적으로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음모론에 근거한 대립과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상황 구성은 '반전'에 대한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즉위식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정후겸에게 '살수'는 모든 것이 자신의 계략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를 친다. 시해 음모가 담긴 서찰이 홍국영의 손에 들어간 것을 알고 그것을 역이용하는 치열한 두뇌 게임이 펼쳐지면서 벌어지는 반전이 정조대왕을 또 다시 위기 상황에 빠지게 만든 것이다. 물론 당연히 그 위기 상황은 해소되겠지만, 반전을 염두에 둔 극적 상황의 허술함은 정조대왕의 성품이 치밀하지 못하다는 시청자의 오해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드라마 <이산>의 재미는 대립과 갈등의 음모론에서 비롯하는 극적 긴장감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음모론에 근거한 극적 상황은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균열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시청자의 세계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확률이 높다. 특히 정치권력이 교체되는 민감한 시기에 난무하는 역사드라마의 음모론은 자칫 대중의 정치 혐오증을 유발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역사드라마는 항상 정치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드라마 <이산>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평생을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던 정조대왕의 인간적인 면모인지, 아니면 어려운 정치 상황에서도 개혁 군주로 이름을 남긴 정조대왕의 '개혁 정신'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윤석진 교수는 2000년 여름 한양대에서 <196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연극·방송극·영화를 중심으로>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004년 가을 <시사저널>에 '캔디렐라 따라 웃고 웃는다'를 발표하면서 드라마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김삼순과 장준혁의 드라마공방전> <한국 멜로드라마의 근대적 상상력> <한국 대중서사, 그 끊임없는 유혹> 등의 저서와 <디지털 시대, 스토리텔러로서의 TV드라마 시론> <극작가 한운사의 방송극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충남대 국문과에서 드라마 관련 전공 과목을 강의하면서 한국 드라마의 영상미학적 특징에 대해 연구 중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