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이 오락 프로그램이 무슨 죄냐고 항변할지 모르겠어. <나는 가수다>를 아끼고, 가수들의 뛰어난 열창을 사랑하며, 최고의 기량에 아낌없는 성원을 보낸 시청자들은 특히 그러할 거야. 그렇지. 프로그램 자체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프로 가수들이 노래로 경합하는 포맷에 과잉된 이데올로기를 덧씌우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어. 오히려 좋은 음악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려 노력하는 예능 연출자의 발상과 수고에 기꺼이 박수를 보낼 수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프로그램을 이제 더 이상 못 봐 주겠다. 왜냐고? 저들의 환호에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기 때문이야.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 당신들을 위한 시청률 대박 신화 창조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거지. 바로 옆에서는 <피디수첩>과 그 좋은 선수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는 지경에, 오락은 별개라며 감동하며 볼 수가 없어. 저널리즘의 죽음을 대가로 한 예능의 성공. 수상하고 불순하거든.

▲ MBC PD수첩 홈페이지 캡쳐
5공 때 딱 그랬잖아.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쭉 같았나? 아무튼 공영방송에 저널리즘의 공간이 사라질 때, 그걸 가리고 그 자리를 채우는 재미나고 화려한 연예오락 무대가 떴잖아. 그 시절에도 노래와 가수, 쇼오락 프로그램 자체가 무슨 잘못 있었겠어? 시대적 상황이 공영방송에게 진실의 대의를 요구하는 데, 오히려 진실의 저널리즘은 땡전뉴스로 대치되고 진실한 저널리스트들은 강제로 추방되니, 그러니 의도치 않게 모순 현실을 은폐한 죄과로 쇼오락 프로그램이 욕먹은 거지. 문맥과 정황이 중요한 거지. 어찌 지금과는 사정이 다른 거야? 나는 오히려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공영방송(엠비씨)에 재미난 예능오락은 자유로이 허락되는 데, 보다 자유로워야 할 저널리즘 프로그램은 제지되는 모순적 측면에서 말이야. 과연 별개의 문제일까? 난 그래. 오늘 공영방송 엠비씨의 현실에서, 두 장르의 운명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시청률”, “경쟁력” 운운하지. <피디수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내부의 탓으로 돌리는, 현실감 뛰어난 시청자 대중들에게는 잘 안 통하는 논법이야. 그래, 프로그램 경쟁력이 중요하지. 그렇지만 경쟁률을 시청률로 환원하고, 그걸 프로그램 평가의 절대 유일의 기준으로 내세우며, 심지어 그런 저열한 논리에 기초해 저널리즘의 존재이유마저 부정하려 들 때, 그때 나는 저 부정한 “경쟁력”과 저 폭압적 “시청률”을 거부하지 않을 수가 없어. “프로그램 경쟁력”이, 진실을 추구하고 현실에 충실함으로써 거짓과 선전에 맞서 경쟁하는 저널리스트 축출을 위한 폭력적 궤변, 검열적 수사로 전락할 때, 그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당장 쓰레기통에 쳐 박아버리고 싶어. 저널리즘 경쟁력은 시청률로 따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말이야. 그런 장르적 특성, 방송의 상식을 인정하지 않는 시청률 경쟁의 전체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겠어. 그 게임규칙의 모범적 프로그램을 일종의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공영방송(엠비씨)의 존폐가 오락가락하는 위급한 시간이야. 그리고 공영방송의 경쟁력은 말씀이야, 공영방송의 존재의미를 좌우하는 시사보도 프로그램의 경쟁력은 말이지, 시청률 따위로 절대 판정하면 안 되는 거야. 인기를 쫒고 시청률에 눈이 멀면, 그건 이미 저널리즘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야. 저널리즘 빠진 공영방송은 앙꼬 없는 찐빵. 무용지물. 그런데 <피디수첩>과 그 제작 노동자들을 자꾸 손보면서, 당신들은 저널리즘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공영방송 엠비씨를 헛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거야. 거짓이 판 치고, 선전이 난무하며, 표피적 리포팅이 대세를 이루는 게 오늘의 방송현실. 진지한 의제, 중요한 현안, 여론 구성적 사건을 은폐하며 배제하는 게 바로 지금 싸구려 텔레비전 보도의 판도. 그런 장에서 경쟁력 올리는 길은 과연 뭘까? 더 야하고 섹시하며 말랑말랑한 걸로? 선정주의와 스펙터클? 뉴스쇼와 연예 리포팅? 아님 저널리즘 자체의 폐쇄?

<나가>를 보고 즐기기 점점 찝찝해지는 이유를 알겠어? 사실 난 당신들이 <피디수첩>을 죽이고 그 좋은 프로듀서들을 축출하면서 내세우는 ‘프로그램 경쟁력을 위해서’라는 말이 본심이 아니라고 봐. 최승호와 이우환, 한학수 피디를 경쟁력이 없어 황당한 데로 보낸 게 아니잖아! 경쟁력으로 따지고 보면, 이 보다 더 우수한 요소가 어디 있어? 있으면 내봐. <피디수첩>을 보는 시청자들의 현실적 필요와 진지한 취향에, 그 어떤 프로듀서가 경쟁력 있게, 진실의 서사로써 다가가 인기와 지지를 동시에 끌어낼 수 있겠어? 이미 모두 한국사회를 쩡쩡 흔들어 놓은, 검증된 한국 최고의 방송 저널리스트들이잖아. 진실탐사, 현실교전의 힘으로 자신과 프로그램의 경쟁력을 입증한 선수들이잖아. 공영방송 엠비씨가 자랑해야 할 얼굴. 그런 경쟁력 있는 페이스들을 황당한 데다 쳐 박고 무슨 경쟁력을 기대해? 저널리즘으로 경쟁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경쟁을 포기했다는 신호의 되풀이지.

자살골이야. 아주 악의적이고 의도적인 자해행위. 그래. 내가 봤을 때, 당신들은 공영방송의 저널리즘 경쟁력, 공영방송 엠비씨의 의제설정 영향력, 공영방송 엠비씨 (피디)저널리즘의 정치적 경쟁력에 전혀 관심이 없어. 오히려 반대지. 공영방송의 저널리즘 기능을 최소화하려 작심하고, 공영방송 엠비씨의 여론생산 능력 극미화를 위해 음모하며, 공영방송 엠비씨 (피디)저널리즘의 정치적 존재의의를 완전히 삭제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야. 선한 저널리스트들이 일 할 수 있는, 진실규명과 권력비판이 가능한 (피디)저널리즘의 공간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 같아. 쌍용차 사태를 취재하고 남북경협 중단 이후의 현실을 다루려 한 피디를 <피디수첩>에서 보내 버렸잖아. 그에 항의하는 저널리스트를 마찬가지로 제작부서에서 배제했지. 결과적으로 <피디수첩>을, 시사교양국을 있으나 마나한 프로그램으로, 허접한 장으로 전락시키고 있어. 그게 바로 당신들에게 부여된 권력의 미션이었던가?

물론 당신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프로그램 경쟁력을 위한 선택이고, 조직의 차원에서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정이며, “비정상적인 부분을 정상화하기 위한 조처”라고 설명하겠지. 진심이라 받아들여 주면 싶겠지? 그럼 한번 말해 봐. 뭐가 비정상이고 뭐가 정상화의 길인지. 아직도 ‘좌파’ 타령인가? 혹시 당신들의 눈에는, 진실을 말하고 현실을 고발하려 들면, 권력에 맞서고 체제를 비판하면 무조건 비정상적인 좌파인가?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는, 당신들도 동조할 칸트 철학을 현장 저널리스트로서 수행하면 바로 좌파가 되는 것은 설마 아기겠지? 실력 있는 비판 언론인들을 프로그램에서 방출하고 어떤 대타를 투입하면 <피디수첩>이, 시사교양국이, 엠비씨가, 공영방송이 정상화되고 경쟁력을 갖추게 될까? <피디수첩>을 좋아하고, (피디)저널리즘을 중하게 여기며, 공영방송 엠비씨를 아끼는 나를 포함한 많은 시청자 대중들을 한번 이해시켜 봐줘.

피디들의 징계가, 또 따를지 모를 징벌은, <피디수첩>을 사수하고 (피디)저널리즘을 보존하며 공영방송 엠비씨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합리적 선택이다. “아이템에 대해 보복 인사조치 할 만큼, MBC라는 조직은 그렇지 않다.” 믿어주길 바래? 그럼, 모두가 보복이라 느끼는 조치를 당장 무효화 해. <피디수첩>이 예전처럼 진실된 저널리즘의 경쟁력을 발휘하게끔, 선한 저널리스트들을 원상 복귀시켜. 그런 당연한 조치가 없으면, 시청률이라는 괴물과 경쟁력이라는 유령을 동원한 내부검속의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개인적으로 용서가 안 돼. 경쟁력 대세, 시청률 게임에 잘 어울리는 이유만으로 <나가>도 거부하겠다는 거야. 옹졸해 보이지만, 트집을 잡는 것 같지만, 하는 수 없어. 전두환 땡전뉴스때도 그랬던 것 아냐? 저널리즘 죽음의 시대에 즐겁기만 한 오락은 있을 수 없어. <나가>는 내가 참고 안 봐도 별일 없지만, <피디수첩>이 무력화된 엠비씨는 진짜 세상의 큰 일 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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