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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나는 슈퍼맨이었다[주관적이고, 사적이고, 사소한 이야기] 추억살리기 책 추천
김은희 | 승인 2020.02.18 13:23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어릴 적 거실에 괘종시계가 있었다. 태엽을 감아주어야만 초침과 분침이 움직이는 시계였다. 어머니는 시계태엽 감는 일을 종종 나에게 시켰다. 그때마다 태엽을 감으라고 말하지 않고 언제나 시계 밥을 주라고 했다. 밥을 먹은 괘종시계는 집에 사람이 없어도, 깊은 밤 모두 잠든 시간에도 종을 쳤다. 밤이면 불 꺼진 빈 거실에서 울리는 타종 소리가 무서워 이불 속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항상 정시에 종을 치고,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시계도 늙어 태엽은 금세 풀렸고, 아무 때나 종을 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누구도 괘종시계 밥을 챙겨주지 않게 되었다.

초능력이 붐처럼 일던 시절이 있었다. 1984년 초능력자인 유리 겔러가 한국에 초대되어 방송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그가 한국을 방문하기 전부터 KBS 방송에서는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다. 한국에 초대되어 방송에 출연하게 될 서양 남자가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했다. 

‘유리 겔러.’ 발음하기 어려웠다. 입속으로 여러 번 발음해 보았지만 ‘유리와 겔러’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았다. 당시 유리라는 이름은 여자에게만 쓰는 이름이었고, 이름 자체만으로도 반짝반짝 빛나는 예쁘고 세련된 이름은 전교에서 한 명, 많으면 두 명 정도 있을까 말까 했다. 여자도 아닌 남자의 이름에 유리라는 단어가 –나는 당시 ‘유리’를 곧이곧대로 해석했다- 들어간다는 것은 낯설었다. 만화 캔디의 남자 주인공 같은 외모를 한 서양 남자 이름은 이물스럽게 입안에서 겉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광고가 나오면 눈과 마음을 빼앗긴 채 화면 속 그를 주시했다. 생각했다. 초능력자라면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 독심술은 기본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염동력쯤은 손쉽게 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애독하는 «소년중앙»에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고, 공간을 이동하는 초능력자들이 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나는 그들이 버스를 들어 올리고, 공중에 떠오르는 장면을 책장이 닳도록 보고 또 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도취 되어 있었다.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담에서 뛰어내리다 어머니께 들켜 눈물이 빠지도록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로 러시아와 미국에서는 초능력자를 양성하여 군사전력에 포함 시키는 계획을 비밀리에 실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는 유리 겔러가 가진 능력을 상상해 보았다. 그는 사물을 움직이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투시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허공을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을지 몰랐다. 내가 만화책에서 보았던 장면이 실제로 재현될 것이라고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진짜 염력이었을까? 한 숟가락(?)하시던 유리겔라 초능력쇼 | (1984.9.23) [그땐 그랬지](출처-유튜브 옛날티비 : KBS Archive)

사람들은 모이면 단발머리를 한 코 큰 서양 남자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가 미국인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미국 사람이어야 했다. 미국인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나라 사람이었다. 무한한 힘과 능력을 갖춘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하늘을 날고, 자동차를 들어 올리는 사람은 당연히 미국인이어야 했다. 유리 겔러가 미국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경악했다. 내가 아는 서양 남자는 미국인과 러시아인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는 줄 몰랐다.

미국인이 아닌 이스라엘인인 유리 켈러가 한국에 왔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그의 손짓, 몸짓 하나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유리 겔러가 숟가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숨죽였다. 모든 소리가 휘발되어버린 것처럼 세상은 조용했다. 숟가락을 문지르는 순간이 영원 같았다. 불현듯 숟가락이 꺾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꺾인 숟가락을 내려놓자 각종 시계가 스튜디오에 준비되었다. 시계는 모두 멈춰 있었다. 그가 다시 에너지를 손끝에 모았다. 그가 힘주어 숫자를 외쳤다.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텔레비전 앞으로 나갔다. 유리 겔러는 스튜디오에 있는 시계만 움직이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청자들에게 몸속에 잠재된 에너지를 모으라고 말했다. 나는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그가 전하는 에너지가 내 몸속에 있는 에너지와 닿기를 바랐다. 그가 에너지를 모아 숫자를 외쳤다. 그가 말했다. 자, 시계를 보세요. 나는 거실로 뛰어나갔다. 이미 오래전에 멈춘 괘종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을 가볍게 날아오르거나, 공간을 이동하거나, 자동차를 들어 올리는 일은 재연되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괜찮았다. 그는 고여 있던 시간을 흐르게 했다. 거실에 걸려 있던 괘종시계를 움직이게 했다. 그가 전한 에너지를 내가 받았고, 우리는 통했다. 

나는 매일 거실에 벽에 걸려 있는 괘종시계 앞에 서서 움직이는 추를 보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움직임이 둔해졌다. 괘종시계는 딱 일주일을 꿈처럼 깨어 있다 멈췄다. 

후에 유리 겔러가 했던 행위는 초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그는 희대의 사기꾼으로 몰렸다. 나는 내 안에 있던 초능력이 사라진 것처럼 슬펐다. 사람들은 실망했고, 비난했다. 숟가락을 구부리는 아이들도 사라졌다. 나도 그때쯤 빨간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담에서 뛰어내리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런데도. 나는. 꿈 같이 깨어 있던 일주일을 믿는다. 괘종시계의 무거운 추가, 초침이 움직이던 장면을 기억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두 권 추천해 볼까요.
『마블이 설계한 사소하고 위대한 과학』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김은희, 소설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김은희  postboat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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